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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산장 이야기] 우리에게 산장이란 무엇인가

장 불재 2016. 11. 25. 19:57



1947년 6월 조선산악회발 제34호 공문.

 ‘백운대산장 휴게소 공동취사장 설치 계획서’로 당시 과도정부에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독일 전문산악매체 <Alpin>에 실린

 짤막한 단신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1894년 뮌헨 근처 휠레 계곡에 작은 산장이 하나 세워졌는데

120여 년이 지나 건물이 낡고 주변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2013년 폐쇄되었다가 독일산악회(DAV)의 노력으로

 이 건물을 산악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2017년 봄 재개방을 앞두고 있다는 산장에는

 독일 산악인들의 지난 한 세기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산을 찾는 사람들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산장을 돌아보았다.

 북한산장, 우이산장, 보문산장, 인수산장,

 지난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비선대산장까지…


그리고 또 그저 어떻게 될지 앞날을 모른 채

남아있는 백운산장과 도봉산장.


회원 130만의 독일산악회도 오래고 낡은 산장을 지켜내어

 새로운 산악문화의 장을 마련했는데 1500만 등산인구의

 우리나라가 이 작은 산장 하나 못 지키랴! 


비선대산장이 허물어지고 난 뒤에야

 그곳이 1957년 생겨나 60년이나 산악인들을 맞아

온 설악산 최초의 산장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피어난 우리의 산악문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산악인들의 문화재.  


법에서 정의하는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의미한다.


산악문화도 사람의 문화이고,

 거기에 지금 1500만 등산인구라는 사회적 현상의 역사적,


 학술적 배경이 담긴다면 비단 막걸리에 두부나 파는

 산중의 식당이나 숙박시설이 아니라 우리의 산장을

 하나의 문화적 자료로서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70년 전 조선산악회에서 제기한 백운산장 건설



 북한산 백운산장의 역사는 백운암이라는 토굴에서 시작하면

 근 100여 년이나 거슬러간다지만 구전 아닌 문서로도

 이미 70여 년 전의 자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에서 보듯 한국산악회 도서관에서

 1947년 백운대산장 건설을 탄원하는

 송석하 초대 조선산악회 회장의 공문을 찾을 수 있었다.


 1947년 6월 조선산악회발 제34호 공문은

‘백운대산장 휴게소 공동취사장 설치 계획서’로

당시 과도정부에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산악회는 이 문서에서

“수도 서울의 최고의 명주인 북한산 백운대는


장안에 인접한 교통위치의 편리함과 그 규모변화의

웅대한 ○○로 근교연산중 최다수의 인사가 집중하는

가장 ○○한 등산목적지로 되어있다”며


“그중에도 백운대하 휴게소는

현재부근 일대의 유일한 식료수와 휴게산막을 가져


 휴일마다 사방의 등산구에서 운집하는

 등산객의 유일한 식사와 휴게의 근거지로 되어있으나


적당한 지도의 미급과 설비관리가 없어…”라며

 산장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산악인의 이상향인 우리 문화시설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건전한 등산과 명승 고적 산림애의 지도를”이라며


 산장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산악문화의 중심지임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국내 사정과 이후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이런 산악인들의 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60년 들어서야 서울산악회가 주축이 돼

 백운산장을 새롭게 건설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 산악사를 가르는

 주요 개척등반과 산악구조의 무대,


또 우리가 배출한 산악인들의 거처가 되어온 백운산장은

도시의 어느 다른 건축물보다도 문화적 가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산악문화도 문화라면 말이다. 



1993년 관리공단이 북한산 주요 산장 직영화 방침을 내렸을 때

도봉산장지기 조순옥씨가 관리공단 이사장에게 보냈던 청원서.

당시 이 조치로 북한산장과 우이산장이 무인화 되었으며

인수산장에는 관리공단 직원이 상주하게 되었다.





‘스토리’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봉산장



 도봉산장은 이와 달리 정부 주도로 설립된 산장이다.

 1970년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영도 선생의 건의로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해 생겨난 전국 35개 산장 중 하나인데,

 무인산장으로 방치되던 것을 1973년부터 고 유용서씨가 들어가 살며

 1974년부터는 한국등산학교 교장으로 사용되어왔다.


1950~60년대 학생 중심의 산악운동에서 1970년대는

 한창 사회인 산악회가 생겨나며 산악운동의 지평이

 엘리트산악운동에서 대중산악운동으로 넓어지는 시기였다. 


산악운동 대중화의 한 축을 이루었던 한국등산학교가

그곳에 자리했다는 것이 바로 도봉산장이 지닌 가치의 핵심이다.


 또한 도봉산장에 남아있는 산악구조의 기록과

조순옥 할머니의 평생의 기록 또한 도봉산장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도봉산장에 남은 이런 문화의 흔적들은 비단 과거의 것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일매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어가


는 현재진행형의 것이기에 이곳 또한 우리 산악사의 중요한 흔적이자

 지표로서 계승 보존해야하는 책임과 의무가 지금의 산악계에 있다.


 산속의 여느 음식점들처럼 변해가려던 속세의 유혹을 버리고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최소한의 것들만 팔아 생계를 유지해 온


 초대 산장지기 유용서씨와 이 뜻을 그대로 이어받은 가족들의 마음은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생해야하는가,


무엇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자세인가

 다시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1993년 유용서씨 타계 이후

산장직영화 방침을 세운 관리공단과


 이에 조순옥씨가 공단에 보낸 청원은

 이러한 ‘문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저희는 누구보다 이 산장을 사랑합니다…

도봉산장을 돌아가신 제 남편의 뜻을 받들어


현행대로 저희가 운영하다가

스스로 명예롭게 내려올 수 있도록 해주십사하고

 청원하오니 부디 선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인가


 과거 북한산장과 우이산장이 헐릴 때

산악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문산장을 쫓기듯 내려온 산장지기 배용복 옹의 소원은

 “공단에서 마련해준다는 임대아파트도 다 필요 없고


그저 산에서 살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는데 산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랑자처럼 떠돌다 돌아갔다.


 ‘친환경’을 이야기하며 어느 날 인수산장은 포클레인에 스러졌고,

 산장 칠판을 빼곡히 채웠던 모두의 꿈은 이젠 거기에 없다.


 비선대산장이 헐릴 때 거길 가봤던 산악인 몇이나 될까.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현판을 산 다니는 누군가 주어와

모처에 잘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에게 산장이란 무엇이었을까.

그저 바람과 추위와 허기를 피하던 거처?


 몇몇 늙은 산악인들이 이야기하는 노스탤지어의 무대?

 산장이라는 공간의 현재적 의미를


단순한 기능의 개념에서만 찾는다면

그건 더 이상 산에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산장은

언제든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있는 낡은 아파트나 식당 건물이 아니다.


그 공동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수한 사람의 기록이며,

 산장은 곧 우리의 산악문화가 켜켜이 쌓아올려진 광장이다. 


두 산장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