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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산장 이야기] “산장이 남아 있어야할 이유는 많습니다”

장 불재 2016. 11. 18. 08:24



백운산장 화재 후,

 지금의 모습으로 설계한 산악인 박승기씨



유럽 알프스의 산장에서 영감 얻어


1992년 백운산장은

불의의 화재로 산장 일부가 불타는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산장을 자신의 집처럼 여겼던

 수많은 산악인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할 수 있었다.


박승기 씨도 그 무명의 산악인 중 하나였다.

“화재로 소실된 산장을 보고 마음이 아팠죠.

 이영구 선생님에게 화재 후 천장이 없어져


 보기 흉하게 된 산장을 유럽 알프스의 산장처럼

통나무로 만들어 증축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건축사무소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우정산악회의 홍승복, 신용구씨와 함께 새로 지을 부분을 설계하고

 허가를 받아 공사를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산장 재건은 만만치 않았다.

우선 산으로 건축자재를 나르는 일이 문제였다.


그래서 3일간 헬기를 동원해 산장 앞으로 자재를 날랐다.

건축허가를 받는 일도 난관이었다.


산장의 토지는 국가 소유였기 때문에

 이를 기다리는 데만 꼬박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허가받는데 3년,

 증축하는데 반년.


결국 백운산장은 화재 후,

 5년이 지난 1997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산악인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백운산장을 위해 두 손 걷고 나선 건

 산악인들의 고향과도 같은 산장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백운산장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1968년,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한 박승기씨는

 산을 오르내리며 백운산장을 보았다.


산중에 있는 작은 돌집은

 15살 소년 박승기군에게 소담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북한산을 올랐던 사람들에게

 백운산장이 의미 없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 역시 산장에 얽힌 추억이야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죠.


어린 시절의 기억,

 산악사고를 수습했던 일,


코오롱등산학교의 교육장으로 사용되며 겪었던 사연들

, 산장에서의 추억이 너무나 많아요.”

그 안에서 박승기씨는

 점점 더 커다란 산악인으로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1986년에는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한산악연맹이 파견한

 ‘86한국K2원정대’의 일원으로

 국가적인 지원 아래 원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해 성공적인 원정을 마친 박승기씨는

 더 높은 고봉에 대한 미련보다

산악지식과 교육에 매진하게 된다.


 그 후 북유럽과 알프스,

 일본 등을 거치며 선진국의 등산문화를 습득했다.


그중에서 눈여겨본 것이

알프스와 일본의 훌륭한 산장시설이었다.

“알프스와 일본의 산장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와요.

우선은 통나무 등으로 설계해

 자연 친화적이면서 미관상으로도 좋지요.


 두 번째는 산장을 대하는 그들의 의식과 태도입니다.

그들은 산장의 존치 이유를 굳이 따지려 들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산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대로 보존하려 합니다.


골칫거리가 되기 전에

 없애놓고 보자는 식의 우리와는 다른 부분이죠.”


백운산장을 증축할 때 사용한 유럽산 통나무는 박승기씨의 오랜 경험과 연구가 만들어낸 결과다.


산장은 산속에 있어야 한다


 산악 선진국에서의 경험은

그가 백운산장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설계할 때부터 통나무를 선택해

자연 친화적인 산장으로 구상했다.


목재는 일반 통나무집에 사용되는 것보다

함수율이 조금 낮은 것은 사용해 세월에 흐름에 따른

 부식이나 변질 등을 최소화시켰다.


실제로

 준공된 지 약 20년 된 백운산장의 나무들을 보면

 썩은 것이 없고 여전히 맑은 향이 난다.


이것은 산장의 설계 단계부터 신중하게 연구하고 실행한 결과다.

그러나 당시 산장을 증축할 때 한 가지 약속했던 것이 있었다.

“산장을 재건할 때 공단과 20년 뒤,

산장을 기부체납 하기로 약속했었어요.


그때만 해도 20년 후라면

 정말 몇백년 뒤의 먼 미래라 생각했는데,


 그게 벌써 내년이에요.

산장이 공단의 소유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되겠죠.


 어느 산악인이 마냥 지켜만 볼 수 있을까요.

특히 우리 윗세대 선배들은 산장을 만들 때


 직접 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발랐어요.

 존재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는 거죠.”

산장은 그 존재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

 건축물로서 근대사의 유물,

청소년의 교육장,


 대피소의 기능,

산악인들의 추억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백운산장을 지켜내기 위해서 먼저 일반인들에게

산장을 알리는 것이 우선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산장이 언제 지어졌고,

 또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알면

 누구나 산장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백운산장은 산악인들의 추억을 갖고 있다.

 길이 잘 뚫리지 않았던 시절,


꼬박 하루를 걸어 올라와

 다음날의 등반을 꿈꾸며 잠들었던 이들에게는 더욱.

“산장에서 저녁밥을 먹고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바라보았을 때,


불암산에 걸린 보름달이

 인수 후면에 비친 야경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단지 이런 모습들이

 그저 우리의 추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