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회 초대 조난구조대장 김길남
김길남씨는 1976년 4월 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회
조난구조대 초대 대장이었다.
백운산장, 인수산장을 베이스캠프 삼아
인수봉 등지에서 일어난 등반사고 등을 수습하는 데 애썼다.
그는 백운산장 철거 소식에
가장 큰 안타까움을 전한 사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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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백운산장 출입문 왼쪽에는
‘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회 조난구조대’라 쓰인 동판이 붙어있다.
이 동판은 1974년 설치된 것으로
당시 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회 회원이었던 신유균씨가
F86 전투기의 동체를 떼어와 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구조대는 대장 김길남(74세)씨를 주축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고,
인수봉, 백운대에서 일어나는 등반사고는 대부분 이들에 의해 수습됐다.
“한국산악회 조난구조대의 전신은
전담, 변완철 선배님들이었어요.
그때 변완철 선배는 안전대책위원장이었는데,
조난자 구조에 매우 열성적이었어요.
덕분에 우리는 매주말을 백운산장에서 지냈고
그만큼 이곳에 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여길 없앤다니 참 이해가 안 가네요.”
김길남씨가 구조대 대장을 맡은 때는 1974년.
3년 전 인수봉 하강코스에서 7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북한산에서는 산악구조대의 필요성과 역할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래서 구조대는 인수봉 인근의 백운,
인수산장을 베이스캠프 삼아 주말마다 북한산을 휘젓고 다녔다.
따라서 당시 김길남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각 산장 주인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백운산장에 전화기가 없었어요.
마침 한국산악회 회원단체들 중
한국통신 관계자들로 이루어진 산악회가 있었는데,
저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백운’이라고 지어졌죠.
고마움의 답례로 그들이 도와줄 게 없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백운산장에 전화기 좀 놔 달라고 했어요.
일반전화가 아니라 공중전화였어요.
바로 설치해주더군요.”
그가 기억하는 산장의 70년대 모습은 지금과 비슷했다.
그런데 현재와 달리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묵었고 주말마다 북적댔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구조대는 믿을만한 조직이었다.
게다가 당시 김씨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를 했던 덕분에
토요일 근무가 없어 항상
가장 먼저 산장으로 올라오는 멤버들 중 하나였는데,
그로인해 산장주인들은
산장보수와 관련된 일을 그에게 서슴없이 맡기기도 했다.
“국기 게양대 국기가 떨어지면 나한테 달아달라고 부탁했어요.
또 지금 산장 앞 공터에 있는 화장실 있죠?
거기는 원래 우물로 쓰려고 팠던 장소에요.
어느날 이영구 선배가 저한테 부탁을 하더라고요.
여기다가 샘을 하나 파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되냐고.
그래서 담당 구청에다가 연락을 했죠.
흔쾌히 올라와서 땅을 파는데,
물이 안 나오는 거예요.
결국 구덩이를 메우기 아까워서
화장실로 용도를 바꿔버렸죠.”
구조대는 평일에도 바빴다.
사고 소식을 접하면 일을 하다가도 북한산으로 올라가곤 했다.
구조작업을 마치고 하산하면 통금시간에 걸려
근처 여관에서 단체로 묵고 다음날 다시 출근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이러한 노고를 인정받아
도봉경찰서에 의해 명예경찰로 위촉되기도 했다.
직장생활과 구조대 활동을 병행하느라 꽤 바빴지만
그는 이때가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참 못됐지.
그때 인수산장 뒤편엔 작은 창고가 있었어요.
거기를 우리 보금자리로 삼기도 했지요.
주말마다 가족들 내팽개치고 올라온 것도 미안하고.
당시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은,
가만있어보자.
이제홍, 신유균, 서정수, 박용현씨 등이 기억나네요.
이외에도 대원들이 총 23명이었어요.
여자 둘에 남자 21명이었나?
아, 여름 피서철에는 대원들 가족들이 전부 올라와서
산장에서 출퇴근한 적도 있었어요.
구조대 일이 좀 고되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세월이 흘러 70대 노인이 됐어도 김길남씨의 기억 속 구조대는
아직도 백운산장을 배경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슴팍에 달린 배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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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애지 말자
백운산장의 역사는 비공식 100년쯤 된다.
김길남씨는 자신의 애착이 담긴 공간이란 이유도 있지만
백운산장은 문화적 유산으로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턱대고 없애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전처럼 말이죠.
보문산장, 북한산장, 인수산장 등은
모두 소리소문 없이 없어졌어요.
어느날 산에 갔더니 없어졌더라고요.
그게 최선이었나 싶어요.
그 산장들은 모두 나라에서 지은 거니 그렇다 쳐도
백운산장은 아니잖아요.
개인이 꾸준히 관리를 해왔고
덕분에 북한산을 찾은 등산객들에게도 요긴했고.
외국인들도 이 산장을 특별하게 여길 게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설악산엘 다녀왔는데,
오색에서 천불동으로 내려왔죠.
하산길에 보니 비선대, 와선대의 식당들이 전부 없어졌더라고요.
설악동에서 지쳐 쓰러질 뻔했습니다.
물론 북한산은 그보다 규보가 훨씬 작긴 하지만
산에서의 상황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김길남씨는 북한산에서의 산장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환경오염에 관한 문제도 별 탈 없을거라고 자신했다.
그는 “70, 80년대에 비해 시민 의식이 굉장히 많이 성숙됐다”며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꾸준히 계도하면
오염에 관한 문제도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시 구조대 시절로 돌아간다면
백운산장에서 무료 등산강좌를 열고 싶어요.
북한산을 찾은 일반 등산객들에게
산과 관련된 다양한 강의를 하는 거죠.
안전한 산행법부터 등반,
등반의 역사 등 여러 정보를 알려주는 거죠.
산장을 그대로 놔두고 지금부터 실시해도 괜찮겠는데요?
박물관을 만드는 것도 괜찮겠고요.
아무튼 산장을 없애기 보단
공공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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