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구·김금자 부부의 ‘백운의 추억’
백운산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영구씨. 눈빛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백운산장이 없어진다.
그동안 북한산에서 스러진 산장들처럼 끝내 무너질 운명에 처했다.
백운산장의 철거를 두고 찬반론이 양립한 가운데
정작 여기서 몇 대째 생계를 이어오고 있는 이들은 담담했다.
그것이 어떤 이들의 눈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비춰졌을 테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풍경을 그저 태평스럽다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들과의 대화에서 문득 아쉬움과 서운함이 느껴졌다.
1924년 당신의 조부 때부터 지금 이 자리 백운산장을 지켜온 이영구씨.
백운산장은 우리나라 1호 산장이기도 하다.
이영구(85세)씨의 기억
“일제시대 때 우리 할아버지(이해문)가 여기로 올라왔어.
그때는 그저 방 한 칸짜리 오막살이였어.
전해들은 얘기로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 여기로 들어와 기도를 했다데,
그리고선 방 한칸짜리 산장을 지었는데,
이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거지.
나는 그때 경기도 장단에서 살았어.
내가 여기 올라와서 살기 시작한 건 15살 때 쯤 이었을 거야.
해방되고 나서 마땅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든.
그래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와주게 된 거고.
처음에는 산장으로 물건을 나르는 일로 밥값을 했어.
새벽에 종로4가까지 가서 물건을 떼다가
전차를 타고 다시 돈암동 종점으로 돌아왔지.
그럼!
당연히 그 짐을 지고 여기까지 걸어 올라왔다고.
지금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1959년 서울산악회에서 주도해 백운산장 건설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과.
가운데 한복 입은 이가 이경구씨의 모친이다.
이런 식으로 산장 일을 했는데,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 없었어.
6.25가 터진 다음에가 조금 힘들었지.
그때 인민군이 여기까지 올라왔었는데,
그때 문교부 차관인가 하는 사람이 여기로 피난을 왔거든.
그런데 그 사람을 숨겨줬다고 할아버지를 잡아갔지 뭐야.
잠깐 있다가 나오긴 했는데,
교통사고 때문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몇 년 뒤에 돌아가셨지.
남은 건 어머니하고 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산장에 불이 나 버렸어.
아아, 그래도 다 타버린 건 아니고,
형태만 좀 남았었지. 어쨌든,
그래가지고 산에 다니던 사람들이 좀 도와줬어.
서울산악회 회원들이었는데,
변완철 선생은 돌아가셨고,
안광옥 선생은 잘 계시지?
그 분들이 많이 도와줬어.
공사자재를 우이분소 앞에다가 갖다놓고는
올라가는 사람들보고 지고 가라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멋모르고 짐을 졌다가 힘드니까
도중에 내려놓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고.
아무튼 산에 다니는 사람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
1960년 이었던가? 그때가?”
백운산장에 얽힌 추억들을 말하고 있는 이영구씨의 부인 김금자씨.
그녀는 22살에 시집와 산장을 내려간 일이 별로 없다.
김금자(76세)씨의 기억
“고향? 충남 공주군 반포면이 집이여!
집에서는 방앗간을 했어.
그때 방앗간이면 굶지 않고 살았지.
서울로 올라온 건 20살 때였나?
그쯤 될 거야. 서
울에 고모가 살았거든.
그 집에서 있다가 어느 날 친구 아줌마가 중매시켜줬어.
그 사람이 저 영감(이영구)이야.
22살 때 산으로 올라왔고.
공주에 있는 우리 집이 계룡산 밑에 있었어.
어떤 사람은 그래서 내가 계룡산 정기를 받고 살다가
북한산 정기를 받으려고 온 교주래!
나 참.
그때도 여긴 2층 집이었어.
돌집이었고.
안에다 침상을 놨었지.
올라오는 길은 온통 넝쿨이었어.
머루넝쿨, 다래넝쿨.
그거 다 헤치면서 올라와야 했다고.
사람도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그 길 넓히느라 고생 좀 했지.
저기 마당도 우리가 다 손 본거야.
아이고,
힘들었지!
여기저기 집안 손보랴,
손님들 상대하랴.
정신없었다고.
도망갈 생각 같은 건 할 틈도 없었어.
여기서 자고 가는 사람들은
토요일 같은 날이나 바위하는 사람들만 자고 갔지.
그때는 토요일에 쉬지를 않았잖아.
그리고 일요일 일찍부터 바위를 하려면
토요일 밤에 와서 무조건 자야했다고.
무료로 재웠지.
대신 밥해주고,
누룽지 끓여주고,
소주팔고 삼양라면 팔고.
이렇게 장사하는 집은 여기서 이 집 하나밖에 없었어.
이영구, 김금자씨의 결혼식 사진.
이숭녕 박사가 주례를 섰고 하객은 전부 산악인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산 다니는 사람들이 여유가 별로 없었어.
항고나 코펠에 쌀이나 된장 정도 담아오는 게 다였지.
그러면 여기서 반찬을 해서 같이 밥 먹고 그랬지.
사고라도 나면 그 환자 뒤치다꺼리를 다 했다고.
쌀이고 반찬이고 다 퍼주고 우리는 누룽지로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그러면서 배를 곯을 때가 힘들었지.
우리 애들은 여기서 학교를 다녔어.
저 밑에 우이초등학교 다녔는데,
아침에 할아버지가 애들 데려다주고 했지.
할아버지는 또 그렇게 내려갔다가 한짐 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왔지.
그땐 도선사까지 지프차가 들어왔어.
그거 타고 다녔지.
애들은 매일매일 산 오르내리는 게 바빠서 학원도 한번 못 보냈고.
그게 제일 미안하네.”
이영구씨의 생각
“결혼식은 저기 산장 앞마당에서 했어.
지금은 돌아가셨지.
한국산악회였을거야.
이숭녕(대한산악연맹 초대회장) 선생님이 주례를 봐줬고.
주로 바위 타는 산사람들이 하객이었는데,
그때 한 20명 정도 됐었나?
애들은 다섯 명이야.
딸 둘에 아들 셋.
큰아들은 여기서 같이 일하고.
둘째 아들은 저기 청계산 근처에서 매장하고 있고.
딸들은 다 시집갔고
. 다들 잘 살지 뭐.
애들이 크고 나서는 같이 산장에서 지내는 게 힘들더라고.
그래서 우이동에다가 집을 하나 얻었어.
그렇게 아랫동네에 집이 생기고 나서는 주로 나만 왔다갔다했어.
저 할망구는 잘 내려오질 않더라고.
한번 내려오면 힘들어서 그런가.
지금은 둘 다 집에 잘 안가.
거기는 우리 산장 짐 보관할 때 쓰거나
편지나 택배 같은 거 맡기는 용도지 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백운산장의 두 부부. 우이동에 거처가 있지만 거의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사람들도 참 많이 구해줬어.
여기가 처음에 산악구조대 역할도 했다고.
사고가 많았는데,
특히 날씨가 안 좋을 때 부상당한 사람들이 많이 내려왔지.
사고가 나서 여기 실려온 사람들을 보면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장을 한 탓에 대부분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어.
그러면 어머님이 부상자들의 언 몸이 풀릴 때까지 계속 주무르시고,
집사람은 물을 데워서 계속 나르고.
부상자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의식이 돌아오면 뭐라도 먹여야 하니까,
겨울에 먹으려고 아껴둔 쌀을 꺼내서 미음을 끓여주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 우리 식구가 좀 힘들었지.
그리고 기억나는 게,
70년 초였을 거야.
11월인가 그랬는데,
겨울이었는데도 이날은 이상하게 따뜻한거야.
그런데 오후에
날씨가 바뀌더니 갑자기 추워지는 거야.
그래서 인수봉 하강코스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줄이 꼬여가지고 내려오지를 못해!
구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사람들은 벽에 매달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지.
결국 다 죽었다고 거기 매달려 있던 사람들.
그때 죽은 사람들 시신을 여기까지 내려놓는 것도 참 힘들었지.
84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바로 그 해에 경찰구조대가 생겼어.
그때부터 사고수습은 경찰들이 했고.
그래도 지금도 사고 나면 여기가 요긴하지.
그럼!
산에 다니는 사람들한테 여기는 아지트지.
아지트!
나한테도 산은 여기뿐이야.
설악산도 거의 못 가봤어.
지리산은 구경도 못했지 뭐야.
설악산, 지리산이 뭐야,
바로 옆에 있는 도봉산도 많이 못 갔는데 뭘.”
이영구씨는 1946년부터 산장에 짐을 나르는 일을 시작했다.
사진은 1960년대 백운산장 내부다.
김금자씨의 생각
“여기 옆에 우물 있지?
지금은 안 쓰는데,
그 우물 만들기 전에 꿈에
어떤 할아버지가 나오더니 거길 파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거기는 부엌이고 여긴 바위가 있는 높은 산인데,
어떻게 우물을 파라는 겁니까? 하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네 평생 먹고도 남을 물이 나온다는 거야.
그래서 땅을 파봤더니 정말 물이 나오데,
;l가뭄이 들어도 여기는 물이 계속 나왔다고.
우물뿐만이 아니지.
산장 기둥부터 여기저기 박은 못도 다 내가 박은거야.
그러니 나는 이 산장이 무척 아깝지.
없어진다고 하면.
언젠가 초등학생 하나가 엄마를 따라 여기 왔는데,
제 엄마한테 ‘많이 팔아줘’ 그러는 거야.
엄마가 왜냐고 물어보니까 한다는 말이
‘비 오고 눈 오면 우리도 여기서 쉬어갈 것 아니야’ 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어른보다 참 낫다고 생각했어.
김금자씨가 그간의 사연을 풀어놓고 있다.
또 어떤 날은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었는데,
위에서 사람 하나가 내려오더니 그대로 다시 가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지금 계곡에 물이 불어서 못 간다고.
비 그치고 30분이면
물 금방 빠지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쉬라고.
그래도 기어코 가겠대.
그러더니 얼마 후에 다시 올라오고서는
도저히 못 가겠다고 그러는 거야.
물이 넘쳐서 못 건너겠다고.
그래서 쉬었다가 잘 내려갔지 뭘.“
만경대 정상에서 바라본 백운산장.
이영구씨의 바람
“요즘 뭐,
교통도 좋아지고 등산코스도 좋아져서
사실 북한산에는 산장이 없어도 돼.
세월이 변하면 그에 맞게
물 흐르듯 맞춰서 사는 거지 뭐.
다만….”
김금자씨의 바람
“우리는 누구한테 공짜로 받은 적도 없고 거짓말 한 적도 없어.
이 집 고치고 손보는 데도 다 우리 돈 들여서 했다고.
공단에서 이거 짓는데 도움을 줬다면 아무 소리 않고,
나가서 돈을 벌든 못 벌든 나가지.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나가라고 하니까 우리는 좀 억울한 거지.
여기서 힘든 세월 견딘 거
서울 사람들이 누가 알겠어.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고 있겠지.
3대째 100년이 다 되도록 살았는데,
안 없어지고 우리가 지킬 수 있게
여러 사람들이 애를 써 줘야지.”
우거진 숲 속에 백운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위의 암자는 백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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