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026세상사는이야기

피부과 간판 보고 왔는데, 두드러기는 안 본다고요?

장 불재 2026. 6. 3. 09:26

일반 질환 치료 거부하는
피부과 범람하는 까닭은

얼굴이 벌게진 여성이 몸을 벅벅 긁으며 헐레벌떡 한 의원에 들어선다.

“아토피 때문에 왔는데요. 의사 선생님 빨리요!”

 

‘상담실장’이 막아선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피부과 전문 병원에 가셔야 돼요.” 의사도 나서서 “저희 병원은 아토피 진료 과목이 없어서요, 힘들 것 같습니다”라고 진료를 거부한다.

 

“간판에 피부과라고 돼 있어서 왔는데 아토피 하나 못 봐요? 그러고도 의사야? (가운 입은 의사에게) 이발사예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SNL의 코너 ‘스마일클리닉’의 한 장면이다. 피부과인 듯 피부과 아닌 피부과 같은 곳,

 

‘미용 전문 의원’을 저격한 예능의 풍자에 대중이 뜨겁게 반응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불편을 겪는 사례가 그만큼 빈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부과인데, 알레르기는 안 본다고요?

 

직장인 A(41)씨는 벌레에 물린 자리가 심하게 붓고 가려워 급하게 피부과를 검색했다. 회사에서 가까운 신촌역 인근에 피부과만 3~4곳이 검색됐다.

 

점심 시간에 급하게 찾아갔지만 돌아온 답은 “일반 피부 질환 진료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여기 피부과 아니에요?”라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시술 손님 예약이 꽉 차 있다”는 것이었다.

 

대기실에 환자가 여럿 있었지만 모두 보톡스·레이저 같은 미용 시술을 받으러 온 ‘손님’이었던 것. A씨는 “간단히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처방해주는 게 전부였는데 그것조차 못한다고 하니 어떻게 의사라고 할 수 있나 싶어 화가 났다”고 말했다.

 

두 곳에서 퇴짜를 맞고 마지막에 찾아간 곳에서야 20분을 기다린 끝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A씨가 회사에서 이 경험을 털어놓자 “나도 겪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갑자기 두드러기가 난 4살 아들을 데리고 피부과를 전전하다 간신히 가정의학과에서 치료했다는 워킹맘,

 

아예 피부과는 포기하고 아토피 치료로 유명한 한의원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동료 등 저마다 ‘간판만 피부과’에 분통을 터뜨린 경험이 있었다.

 

피부 질환을 진료하는 병·의원 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대한피부과의사회에 따르면, 전국에 피부 질환을 진료하는 병·의원은 최대 1만5000곳에 달한다.

 

그런데도 미용 목적이 아니라 일반 피부 질환 때문에 의료기관을 찾았다가 필요한 진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일반의(전문의 자격이 없는 의사)가 진료하는 곳이 많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반의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는 땄지만, 전공의 수련을 받지 않아 전문 과목이 없는 의사다.

 

1년의 인턴, 3~4년의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거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전문의보다 임상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현행 의료법상 피부과 전문의가 있는 곳은 ‘○○피부과의원’이라고 진료 과목 자체를 바로 병원명에 넣을 수 있다. 일반의가 개원한 경우에는 ‘●●의원’이라는 이름에 작은 글씨로 ‘진료 과목 피부과’ 등을 따로 표기해야 한다.

 

같은 피부과처럼 보여도 숨겨진 뜻이 있다. '○○피부과의원'은 피부과 전문의가 상주하는 곳, 진료과목을 따로 표기한 '●●의원'은 타전문의나 일반의가 진료하는 미용 클리닉일 가능성이 높다. 피부과 성형외과가 몰려 있는 서울 신사역 인근의 모습.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피부 진료’를 표방하는 전국 병·의원 중에서 피부과 전문의(2950명)가 운영하는 병원은 작년 4분기 기준 1516곳. 10곳 중 9곳은 일반의가 진료한다는 얘기다.

 

연간 새로 배출되는 피부과 전문의는 50~60명 선이지만, 매달 새로 생기는 미용 전문 의원만 100곳이 넘는다. 의료계 관계자는 “임상 경험이 적은 일반의들은 전문의보다 피부 질환 진료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B씨는 “피부 알레르기 증상이 생겼는데 진료가 가능한지 의원에 물었더니 ‘전문의를 찾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안내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2000곳 의원은 건보 진료 ‘0건’

 

수익성 문제도 크다. 미용 시술은 고액의 비급여 수익을 가져다주지만 일반 피부 질환 진료는 상대적으로 수가가 낮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국민의힘 백종헌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건강보험 진료 비용을 단 한 건도 청구하지 않은 의료기관은 1974곳에 달했다.

 

전체 의원급 의료기관의 5.2% 수준이다. 2022년에는 1540곳이었는데, 3년 만에 28% 늘었다. 건강보험공단에 비용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해당 의료기관이 비급여 위주로 진료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건보에 비용 청구를 하지 않은 의료기관의 95%는 성형외과와 일반의 의원이었다. 이 중 일반의 의원이 60%였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개원가 경쟁 환경은 병·의원이 미용 시술에 더 관심을 쏟게 하는 요인이다. 포화 상태에 이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고가의 장비 도입비 등 투자 비용을 회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산부인과·응급의학과 등 필수 의료 전문의들이 출생률 저하와 낮은 수가 등을 이유로 미용 의료로 넘어오는 사례가 많아졌다.

 

여기에 ‘의대 정원 논란’ 등이 겹치면서 의대 졸업 후 곧장 개업하는 일반의들도 크게 늘었고, 이들 대부분이 미용 클리닉 개원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의료계는 보고 있다.

 

강남역 인근에서 10년 넘게 피부과를 운영하고 있는 전문의 이모(54)씨는 “미용 중심 피부과 헤게모니는 몇몇 기업형 클리닉이 잡은 지 꽤 오래됐다”며 “일반의들도 이런 곳에서 페이닥터로 어렵지 않게 시술 노하우를 익힌 뒤 개업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경기도권에서 5년 전에 개원한 피부과 전문의 김모(44)씨는 “나도 도움을 받았지만 ‘개원 컨설팅 업체’들이 워낙 많아졌다”며 “의사의 경력이나 전문성보다 온갖 홍보·마케팅 수법에 의존해 미용 환자들을 끌어모으는 데 특화돼 있다”고 했다.

 

피부암을 단순 점으로 오인하기도

 

피부 진료 병·의원이 늘어나면서 부작용이나 오진 등으로 피해를 보는 환자도 늘고 있다. 은행원 신수지(40)씨는 피부 시술을 받았다가 오히려 피부가 망가져 고생했다.

 

신씨는 “피부 톤을 밝게 해주는 시술을 받았는데, 레이저 부작용으로 피부염이 생긴 뒤 만성화되고 편평사마귀까지 생겼다”며 “시술을 받은 곳에서는 별다른 대처를 못 하는 데다 피부과 전문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후속 조치를 맡길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지역 피부과 전문의 조모씨는 “다른 클리닉에서 레이저 시술을 잘못 받고 피부염이 생기거나, 주사 피부염을 접촉 피부염이나 지루성 피부염으로 잘못 진단받아 피부가 상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대한피부과의사회에 따르면 피부암인 기저세포암이나 악성 흑색종 등을 단순 점으로 오인해 레이저로 없애려다 대학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피부암으로 밝혀진 사례도 있다. 필러 시술로 인한 실명, 레이저 오남용으로 인한 화상 등 사례도 더러 보고된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병·의원 간판에서 ‘진료 과목’ 표기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을 검토 중이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는 고령층이나 지방에서는 진료 과목을 보고 병원을 찾는다’, ‘표기를 제한하면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은 더 심해질 수 있다’는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환자들의 혼선을 막을 수는 있지만 ‘질환 진료 거부’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정부는 일단 새로 오픈하는 의료기관부터 단계적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피부과의사회는 붉은색 ‘피부과 전문의’ 표식을 만들어 전문의가 운영하는 곳을 분명히 구분 짓도록 하고, ‘피부과 전문의 찾기’ 같은 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개원면허제’ 도입 같은 보다 강화된 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은 3년, 영국·일본·캐나다는 의대 졸업 후 최소 2년 이상의 임상 수련을 거쳐야 독립 진료권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의대 졸업만으로 단독 개원이 가능한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의료계에서는 “출혈 경쟁으로 기존 피부과 의원들의 수익성이 낮아지자 진입 장벽을 높이려는 것”이라는 시선도 많다.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에 환자들의 불편은 커지고, 의료 소비자들의 손익 계산은 엇갈리는 셈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