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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4좌 완등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

장 불재 2023. 8. 5. 10:29

 

지난달 본지에서는 한국등산연구소 제4회 세미나 중에서 첫 번째 주제발표로 곽정혜 한국등산연구소 연구동인이 발표한 <8천 미터 14좌, 그 정상은 어디인가>를 소개하였다.

 

이번에는 <한국의 14좌 완등시대를 돌아본다>는 제목으로 오영훈 한국등산연구소 부소장의 두 번째 주제발언을 2회에 걸쳐 전하고자 한다.

 

사실 이 주제는 국내 산악인에게는 다소 난감한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은 두 번째 발표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8000ers.com의 보고서는 국내에도 영향을 끼친다. 과거 히말라야 등반 기록의 정정은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등반을 비롯해 등반의 가치를 평가하는 부분까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해 국내 14좌 완등(주장)자 8명 중 누구라도 직접 소명하는 게 필요하지 않으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섭외가 어려웠고 꼭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겨졌다.

 

앞서 문제가 되었던 등반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개된 듯하며 본인이 자신의 등반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까지도 충분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8000ers.com의 보고서를 통하여 약 30년 전 시작되었던 국내 개인 14좌 등반을 전반적으로 돌아봄으로써 당시의 유산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8000ers.com은 에버하르트 유르갈스키(독일)가 2008년 설립한 소규모 사설 비영리 기관이다. 이들은 연대기 기록자(chronicler)로서 올바른 기록을 소명으로 삼아 지식 창출의 즐거움 자체를 추구한다.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해외 등반의 성과들을 집대성하려는 노력은 이어져 내려왔다. 손경석(<한국등산사>), 손재식(<한국산악>), 남선우(<역동의 히말라야>), 김진성(<산악연감>), 김창호(<부산산악연감>) 등이 있었다.

 

 

 8천 미터 14좌 등반은 ‘정상수집 등반(peak bagging)’이다. 특정 기준에 따라 추려진 산들을 모두 오르는 것을 목표하는 등반을 말한다.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로 8천 미터 14좌 뿐만 아니라 알프스 4천 미터 82개나 미국 천사백피트 58개 등 세계 곳곳에 여러 가지 ‘시리즈’가 있다.  

 1985년 쿠르티카∘샤우어의 가셔브룸 4봉 등반은 정상에 오르지 못했으나 대단히 등반으로 평가받았다. 정상수집형 등반이 아니었고, 대신 높은 난이도와 등반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한 소위 ‘엘리트 알피니즘’ 등반이었다. 등정은 부차적이었다.

 

반대로 정상수집 등반의 핵심적인 평가 기준은 ‘인증’이다. 8000ers.com발표에 따르면 국내 14좌 완등 주장자들은 몇몇 산에서 인증에 실패했거나 아직 인증에 나서지 않았다.

 미등정 판정이 된 김창호의 경우 등정 진위 논란에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였다. 아직 정상이 특정되어있지 않았던 안나푸르나 1봉은 구글어스 이미지 분석을 통해 정점의 위치를 파악했고(당시 원정대장 홍보성 증언),

 

마나슬루는 고정로프가 끝나는 안부에 배낭을 내려놓고 정점까지 기어갔다가 왔으며(유가족 증언), 다울라기리 1봉에서도 역시 배낭을 내려놓고 실제 정점까지 다녀왔다(홍보성 증언)고 한다.

 

필자는 이 내용을 취합해 8000ers.com 담당자에게 의뢰해 기록 수정을 타진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김창호가 제시한 정상 사진은 정점이 아닌 아래 지점이었다.

 

정점 사진은 제시하지 못했다. 김창호와 함께 올랐던 서성호의 미등정 판정은 유지됐다. 김창호가 정점을 갔다면 그는 왜 정상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정점까지 오른 게 과연 사실일까?

 정상수집 등반의 규칙에 따라 김창호의 기록은 모두 ‘미등정’이 된다.

엄홍길은 1993년, 시샤팡마 등반을 마친 뒤 제시한 정상 사진은 명확하게 정상임을 보이지 못했다. 청문회까지 개최됐으나 역시 등정 판정으로 귀결되지는 못했다.

 

2001년 9월 다시 시샤팡마를 찾아 19993년에 올랐던 곳과 같은 지점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엄홍길은 인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같은 곳을 두 번 오른 셈이다.

 1981년부터 아시아 고산지대 등반사를 기록하고 있는 유르갈스키는 각국 산악단체에서      이 문제에 앞장서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는 이 사안에 관해 소극적인 입장 곧 무대응으로 대응하겠다고 한다.

 

독립기록자로서 필자는 “8천 미터 14좌 정상에 모두 오른 한국인은 없다.”“마나슬루 정상에 한국인이 오른 적은 없다”와 같은 8000ers.com 판정 내용을, 필자가 앞으로 작성하는 모든 공식 문건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증거가 확보된다면 기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14좌 등반기의 등정이 미등정으로 바뀌는 것은 큰 반향을 불러올 만한 사건이다. 예를 들어 메스너는 안나푸르나 1봉 정상을 고도차 5m, 거리 65m 남겨둔 지점까지만 올랐다고 하여 미등정이라고 판정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등반사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메스너의 반응은 적어도 8000ers.com 연구진에게는 의외였다.

 

그는 “누군가 내가 한 게 바보 같은 짓(Bullshit)이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 두자. 그 긴 능선 위에서 겨우 5m 못 미친 곳이라도 말이다.”라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미등정이라는 판정을 명예 손상으로 여긴 셈이다.

 14좌 등반은 대형 프로젝트다. 14좌 기록 정정은 해당 등반가의 위신은 물론 연관된 수많은 사람, 팬들, 일반 여론과도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

 

즉 14좌 기록 정정이 갖는 함의를 파악하려면 개인 14좌 등반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 사회적 열풍이 되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14좌’ 개념이 처음으로 생겨난 때는 그 봉우리들의 초등이 시작되던 당시이다. 1950년 안나푸르나 1봉이 초등 되면서 피트(ft)로 따지던 히말라야 봉우리의 높이가 미터(m)로 굳어졌다.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피트로 따지면 안나푸르나 1봉은 최고 수준인 29,000피트대에 한참 못 미치는 26,000피트대이지만, 미터로는 최고인 8천 미터대에 속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렇게 8천 미터 14좌는 제국 열강 사이 국력 경쟁의 새로운 무대로 창안되었다. 그리고 그 각축전이 수십 년 뒤에 시작하는 개인 14좌 완등 경쟁의 모태였다.

 개인 14좌 완등 경쟁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래 표는 완등 주장자 53명을 국적(22개)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상위권 국가 면면을 보면 해당국의 특성과 14좌 완등(주장)자 인원 사이에는 어느 정도 연관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8명), 스페인(7명), 폴란드(3명) 등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는 알파인 등반이 일상적으로 행해진다.

 

네팔(6명)과 중국(티베트계 가이드, 3명)도 고산등반 가이드 인원이 많으니 연관성이 크다. 카자흐스탄(3명)도 소련 시절 군대 형태의 산악스포츠 문화를 계승했고 또 14좌 완등은 등반부대에 복무했던 걸출한 데니스 우룹코가 이끌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미스터리다. 만년설도 없고 알파인등반/고산등반의 등반가도 극소수이다. 그런 나라에서 왜 그토록 8천 미터 14좌에 열광하였던가?

 

필자는 산악계 내의 의미부여, 대중매체의 대국민 포장, 기업체 후원이라는 3요소가 맞물린 결과라고 본다.

등반가나 산악계 지도층 인사, 등반비평가들이 등반을 영웅서사로 재구성하고 히말라야 8천 미터 고봉을 신화화했다. 산악전문지와 일반 대중매체는 이를 자신과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업적으로 바꾸어 묘사했다.

 

기업체는 브랜드 이미지 향상과 이윤을 함께 추구하는 특출난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한국 등반가들은 14좌 프로젝트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산악계 지도자는 어떤 비전으로 설파했을? 수많은 담론을 검토해 보니  ①국가와 민족의 승리 서사 ②진보와 우열의 서사 ③ 체험 우선주의의 서사  ④ 인간관계의 서사 등 네 가지로 수렴할 수 있었다.

 우선 국가와 민족의 승리 서사를 살펴보자. 식민과 전쟁, 반공과 개발독재를 거치면 대한민국 사회의 이념 지평은 국가를 정점에 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휩쓸고 있었다.

 

전문등반이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행위라는 인식은 여러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규정되고 강조됐다.

 

김정태는 전쟁 직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재조 일본인 등반가들과 나섰던 암벽∘빙벽 등반의 기억을 ‘민족적 경쟁’이라는 화두로 재구성하면서 대한민국 등산의 근원을 민족주의적 투쟁 서사로 규정했다.  

 

박철암은 원정 출발일을 광복절로 삼았고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건을 ‘세계 정상에 우리가 섰다’라는 (한국일보 기사) 표제의 기사들로 대중의 뜨거운 성원을 끌어냈다.

 한국을 ‘대표’ 한 8천 미터 등반은 1977년부터 1995년 ‘한국산악계 14자 완등 숙원’이었던  브로드피크까지 이어졌다.

 

1980년대의 8천 미터 등반은 1990년대 초중반에 시작되는 14좌 완등(엄홍길)이나 7대륙 최고봉 완등(허영호)같은 ‘개인 영웅주의 등반’의 서막이었다.

따라서 14좌 개인 완등도 자연스럽게 국가승리의 서사를 발판으로 삼았다. 14좌 프로젝트를 처음 결심해 실행에 옮긴 이는 엄홍길이다.

 

1995년 봄, 엄홍길은 카를로스 카르솔리오(멕시코)등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인들은 노력하더라도 8천 미터 등반이 쉽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 분개했고 만일 자신이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후배들에게 똑같은 수모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14좌 완등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5년 뒤 결실을 본 엄홍길의 14좌 완등(주장)은 본인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우리 민족의 산에 관한 잠재력이 월등히 뛰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자랑스럽게 삼았다.

 그 뒤 연이어 탄생하는 14좌 완등(주장)자에게는 ‘국가를 빛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김병준은 엄홍길과 박영석을 ‘세계적으로 온 인류가 존경할 만한 영웅’이라고 추켜세웠고 〈이마운틴〉은 “14좌 완등은 한국이, 등정자 수는 일본이 앞섰다”며 한일 양국 비교로 우열을 따지기도 했다.

 

김영도는 한왕용이 14좌를 완등하면서 국내에 14좌 완등자가 셋이나 되었다며  “우리나라는 선진 등산국가들을 제치고 선두에 섰다”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규정했다.

 

 

 

‘14좌-국가 승리’ 도식은 당대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해 도출되는 인식이었다.

 

대한산악연맹은 2001년 “경제불황의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엄홍길, 박영석씨의 8,000m 14좌 완등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했다.”면서 문화관광부로부터 산악발전기금 10억 원을 받았다.

2010년 , 오은선의 14좌 여정 마지막이었던 안나푸르나 1봉 등정은 KBS 지상파방송으로 생중계되면서 한편으로는“천안함 사태로 마음이 가라앉은 국민을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당시는 소위 ‘등정주의/등로주의’ 등반분야가 확연해지고 동시에 14좌 열기가 크게 줄어들었던 때다. 정작 그같이 보도한 <사람과 산>같은 호에서는

 

유럽에서 열린 황금피켈상 시상 내용을 전하는 기사를 실으며 그 표제로 “셀파와 고정로프 사용한 등반은 관광이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표제를 달았다. 등반가들에게는 14좌=국가승리 도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