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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독도 표석 복원 “그동안 빈자리로 남겨두어 미안합니다”

장 불재 2015. 9. 16. 20:35

 

한국산악회,  

독도표석 1953년, 2005년에 이어 세 번째로 재건립

조면암 비석에 '독도' 한글, 한자, 영어(DOKDO KOREA)로 표기

 

우리 땅’ 독도에 한국산악회의 표석(標石)이 다시 세워졌다.

 한국산악회(회장 장승필)는 8월 9일 독도를 방문해

 한국산악회 임원 및 산악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표석 제막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한국산악회 장승필 회장을 비롯해

 남선우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이사장,

조규배 서울시산악연맹 회장, 신순식 경북도 독도정책관 등

 160여 명이 함께해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재확인했다.

 

▲ 한국산악회가 지난 7월 독도 동도 자갈마당(몽돌해변)에
 표석을 재건립하고 8월 9일 제막식을 가졌다.
최초의 표석과 모양과 크기는 같지만 ‘LIANCOURT’ 대신
 ‘DOKDO KOREA’라고 글귀를 바꿨다.
표석 뒤로 삼형제굴바위가 보인다.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표석을 세운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한국산악회는 1953년 10월 15일,

36명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명시하기 위해

 독도 동도 서쪽 몽돌해변에 최초의 표석을 세웠다.


조선산악회, 1947년 독도에 최초로 영토 표지목 설치

 

이에 앞서 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는

1947년 독도에 최초로 영토 표지목을 세웠다.

 

광복 후 미군정 치하에 있던

 1947년 6월 17일 경상북도 최희송 지사

는 과도정부의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독도가 일본인 개인 소유의 섬으로 돼 있는  탓에

 일본인이 우리 어민의 조업을 금지하고 강제로 내쫓고 있다”며

 “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청원을 보냈다.


이에 과도정부는

 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에 도움을 청했다.

 

 1945년 9월 15일 창립한 조선산악회 초대회장이었던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1904~1948) 회장은

울산 출신의 민속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갑부였다.

 

 송석하 회장은 조선산악회 초대 회장뿐만 아니라

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인

 국립민족박물관(1946년 4월 개관)의 초대 관장이기도 했다.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 독도 표석 복원]

 

▲ 1 1947년 8월, 최초로 독도를 조사한 조선산악회의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 
 2 1953년 10월 15일, 한국산악회 홍종인 당시 회장이 최초 표석을 설치하는 모습과 당시 표석의 모습.
3 1953년 10월 15일,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독도 동도에 상륙해 일본인들이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내고 있다. 한국산악회는 말뚝을 뽑은 뒤 최초의 표석을 세웠다. 

조선산악회는

단순히 산을 통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국토조사단체였으며,

당시 젊은 지성인들이 모인 엘리트집단이기도 했다.

 

조선산악회는 창립 이후 국토구명사업을 펼쳤는데,

1946년 2월에는 한라산에

등산대와 학술대를 편성해 다녀온 후 귀환보고강연회를 열었고

1946년 7월에는

오대산과 태백산맥(백두대간)을 조사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과도정부는

 송석하 회장이 이끄는 조선산악회가 독도를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독도 영유권에 대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더구나 미군정과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비교적 정치에서 자유로운

 민간산악단체에 독도 조사를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국산악회 3, 5대 회장을 지낸 홍종인(당시 조선일보 기자)씨는

 훗날 회고에서 “송석하 회장은 일본인들이 언젠가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니

 되도록 빨리 조선산악회가 독도를 조사해 우리 국민에게 알리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신념을 갖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산악회는 1947년 8월에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구성했다.

대외적인 명분은 울릉도 학술조사였지만 주임무는 독도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대는 송 회장이 대장을 맡고

사회과학반, 동물반, 식물반, 농림반, 지질·지리·광물반,

의무반, 전기통신반, 사진·보도반 등 총 65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사대는 해안경비대의 배를 타고 울릉도를 거친

후 독도 동도에 들어가 조사활동을 하고

 ‘朝鮮 慶尙北道 鬱陵島 南面 獨島

(조선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독도)’라는 푯말을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독도에 설치한 최초의 영토 표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6월 25일 일본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정박해 이 푯말을 뽑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한일회담에 대비해 조선산악회의 후신인

한국산악회(1948년 8월 15일 개칭)에 독도 조사를 의뢰했다.

 

한국산악회는 탐사대를 꾸려

그해 8월 15일 독도에 들어가 조사활동과 독도 표석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독도 인근에서 미군기들이

폭격 연습을 하고 있어 독도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1년 2개월 뒤인 1953년 10월 15일,

조사대는 해군함정을 타고 독도에 상륙했다.


독도에 내린 조사대는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쓴

 일본인이 세운 푯말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가로, 세로 각 60cm, 45cm의 화강암 표석을 세웠다.

 

 이것이 한국산악회가 세운 최초의 표석이자 ‘독도 1호 표지석’이다.


표석의 앞면에는

 ‘독도/ 獨島/ LIANCOURT’,

뒷면에는

 ‘한국산악회/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

/ KOREA ALPINE ASSOCIATION/ 15th AUG 1952’라는 글귀를 새겼다.


그러나 이 표석은 이후 자취를 감췄다.

 표석을 세운 지 일주일 후인 10월 22일,

일본 해상보안청 요원들이 독도에 들어와

이 표석을 뽑고 또다시 다케시마 푯말을 세운 것이다.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 독도 표석 복원]
▲ 표석 제막식을 마친 후 독도 선착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한국산악회 회원들.

한국산악회, 세 번째 표석 재건립

 

이후 경북도와 한국산악회는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표석을 복원했다.

 

당시는 일본 시마네현이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등 도발을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두 번째 표석은 2008년 8월 슬그머니 철거되었다.

 이번엔 일본인의 손이 아닌 우리의 자발적인 철거였다.


2008년 ‘리앙쿠르(Liancourt)’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이 일자

 울릉군은 2005년 복원한 표석을

 한국산악회에 통고도 없이 철거해 버리고 말았다.

 

 표석에 ‘LIANCOURT’라는 글귀가 들어가 있고

 이 내용이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리앙쿠르는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이름으로,

 제3국에서는 이 배의 이름을 따 독도를 리앙쿠르라고 불렀다.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기에 앞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적 명칭을 사용한다는 핑계로

 국제사회에 ‘리앙쿠르’란 이름을 퍼트리고 있었다.

이후 한국산악회의 독도 표석은 빈 공간으로 방치되어 왔다.


한국산악회는 이후

세 번째 독도 표석을 재건립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독도표석위원회를 구성해

지난 3월 독도 동도 자갈마당에 표석을 설치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현상변경을 신청해 허가를 받았다.

 

독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336호)인 관계로

시설물 등을 설치하려면 사전에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번에 재건립된 독도표석은

 한국산악회 유학재 이사, 영화감독 박준기 회원,

산악인이자 문화재보수 기능보유자인 김동관 회원이 제작팀으로 나섰다.

 

 이들은 6월 28일부터 울릉도 서면 남양리 비파산 주상절리에서

원석으로 쓸 조면암(粗面巖)을 채취해

1953년 세운 최초 표석과 동일한 크기로 표석을 제작했다.

 

 최초의 표석이 화강암인데 반해

이번엔 조면암으로 제작한 것은

문화재청의 ‘독도의 암석과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설치조건에 따른 것이다.


표석 전면에는

 ‘독도 / 獨島 / DOKDO KOREA’라는 글귀를 새겼다.

 

1953년 최초의 비석에 새겼던

 ‘LIANCOURT’ 대신 ‘DOKDO KOREA’로 바꾼 것이다.

 

후면에는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와

최초로 표석을 세우려 했던 날짜인 ‘1952. 8. 15’를 한글과 영문으로 새겼다.

 

한국산악회는 제막식에 앞서 6월과 7월,

두 차례 독도를 방문해 미리 표석을 설치했다.

박준기 감독은 표석 제작과정부터 설치, 제막식에 이르기까지

 독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막식에 참석한 참가자들은

8월 9일 새벽, 서울과 포항에서 출발해 강릉에 도착,

 강릉항에서 다시 쾌속선을 타고 2시간 40분을 달려서야

 울릉도 저동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사동항으로 가 쾌속선을 타고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독도에 닿았다.

 그야말로 긴 여정.

 ‘우리 땅’ 독도는 그렇게 가깝고도 먼 섬이었던 것이다.


파도가 거칠어 좀처럼 접안이 어렵다는 독도였지만

 이날만큼은 푸른 하늘과 잔잔한 파도로 길을 열어 주었다.

 

 제막식은 독도 동도 자갈마당(몽돌해변)에서 열렸다.

 제막식에 참석한 160여 명의 한국산악회 회원들은

 선착장에 모여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독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30분 정도로 한정되어 있어

 제막식은 장승필 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표석을 덮은 천을 내리는 것으로 짧게 마무리되었다.

 

새벽부터 이동한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독도에 다시금 한국산악회가 표석을 세우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재확인하는 시간이기에 모두의 얼굴은 만족스러웠다.


서울 성북구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참석했다는 김인식(55)씨는

 “한국산악회 회원으로서 표석 재건립은 무척 기쁜 일”이라면서

 “광복 70주년과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인 올해 독도를 방문했다는 것이

 아들들에게는 잊히지 않을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도를 두 번째로 찾았다는 오명일(63)씨는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표석을 세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2008년 이후 그것이 없어진 줄은 몰랐다”며

 

 “이제라도 빈자리를 채우게 되어 다행이며

독도는 우리 땅임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짧은 제막식이 끝나고 기념사진 몇 장을 찍을 시간도 없이

쾌속선은 다시 울릉도로 향했다.

 

제막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자그마한 창밖으로

 멀어지는 독도에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했다.

 

한국산악회 회원 등 160여 명은 울릉도로 돌아온 후

 11일까지 울릉도 성인봉 산행과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산이 지키고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 독도 표석 복원]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독도학술대회 개최


한국산악회와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가 주최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주관한 창립70주년 기념 독도학술대회가

 8월 7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는 한국산악회 장승필 회장, 박종한 부회장을 비롯해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남선우 이사장,

 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박사 등이 참석했으며,

한국산악회 회원과 학술대회 관계자 200여 명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장승필 회장은 인사말에서

 “광복 이후 한국산악회 선배들은 독도에 상륙해 일제의 뿌리를 뽑아내고

 이곳이 한국의 영토임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이정표를 세웠다”며

 “우리 국민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인식하게 된 게

 바로 한국산악회의 독도상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한 부회장은 기조연설을 통해

 “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가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를 파견한 1947년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선언하고 재차 확인한 해로 역사에 남아 있다”며

“한국산악회의 독도 답사는 단순한 학술조사가 아니라

우리 국토에 대한 소유권 선언과 실천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더불어 박 부회장은 “한국산악회가 지키고 탐험하며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동해의 작은 섬 독도가 아니고

 바로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연설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발표가 이어졌다.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김호동 교수가

‘역사적 접근-한국산악회 활동의 역사적 평가’란 주제로 발표했으며

 △국제해양법학회 박현진 교수, ‘법률적 접근-한국산악회 활동의 국제법적 평가’

 △서원대학교 송호열 교수, ‘지리적 접근-한국산악회 활동의 지리적 평가’

△경상북도 신순식 독도정책관,

‘정책적 접근-1945년 이후 경상북도의 독도행정과 정책’을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를 마친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정병준 교수, 세종대학교 교양학과 호사카유지 교수,

 동북아역사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이 토론자로 나서

발표자들과 함께 종합토론 및 강평을 진행했다.


이날 발표대회를 통해 참석자들은

 “한국산악회가 1947년 8월 16일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한 것은

 본질적으로 일제가 식민시기와 광복 후까지도 자행한

 일본의 불법행위를 공식 조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후 우리 정부와 국민들,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게

독도는 우리 땅임을 인식하고 정책을 구상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 구실을 했다”는 데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