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악회,
독도표석 1953년, 2005년에 이어 세 번째로 재건립
조면암 비석에 '독도' 한글, 한자, 영어(DOKDO KOREA)로 표기
우리 땅’ 독도에 한국산악회의 표석(標石)이 다시 세워졌다.
한국산악회(회장 장승필)는 8월 9일 독도를 방문해
한국산악회 임원 및 산악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표석 제막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한국산악회 장승필 회장을 비롯해
남선우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이사장,
조규배 서울시산악연맹 회장, 신순식 경북도 독도정책관 등
160여 명이 함께해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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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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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표석을 세운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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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는 1953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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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명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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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명시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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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동도 서쪽 몽돌해변에 최초의 표석을 세웠다.
조선산악회, 1947년 독도에 최초로 영토 표지목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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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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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독도에 최초로 영토 표지목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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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미군정 치하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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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6월 17일 경상북도 최희송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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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과도정부의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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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일본인 개인 소유의 섬으로 돼 있는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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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우리 어민의 조업을 금지하고 강제로 내쫓고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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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청원을 보냈다.
이에 과도정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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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에 도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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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15일 창립한 조선산악회 초대회장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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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1904~1948) 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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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출신의 민속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갑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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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 회장은 조선산악회 초대 회장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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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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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족박물관(1946년 4월 개관)의 초대 관장이기도 했다.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 독도 표석 복원]](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5/09/01/2015090101790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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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47년 8월, 최초로 독도를 조사한 조선산악회의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
- 2 1953년 10월 15일, 한국산악회 홍종인 당시 회장이 최초 표석을 설치하는 모습과 당시 표석의 모습.
- 3 1953년 10월 15일,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독도 동도에 상륙해 일본인들이
-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내고 있다. 한국산악회는 말뚝을 뽑은 뒤 최초의 표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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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악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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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산을 통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국토조사단체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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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젊은 지성인들이 모인 엘리트집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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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악회는 창립 이후 국토구명사업을 펼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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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에는 한라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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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대와 학술대를 편성해 다녀온 후 귀환보고강연회를 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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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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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과 태백산맥(백두대간)을 조사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과도정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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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 회장이 이끄는 조선산악회가 독도를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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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에 대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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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미군정과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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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비교적 정치에서 자유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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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산악단체에 독도 조사를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국산악회 3, 5대 회장을 지낸 홍종인(당시 조선일보 기자)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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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회고에서 “송석하 회장은 일본인들이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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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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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빨리 조선산악회가 독도를 조사해 우리 국민에게 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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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신념을 갖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산악회는 1947년 8월에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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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인 명분은 울릉도 학술조사였지만 주임무는 독도에 대한 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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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는 송 회장이 대장을 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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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반, 동물반, 식물반, 농림반, 지질·지리·광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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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반, 전기통신반, 사진·보도반 등 총 65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사대는 해안경비대의 배를 타고 울릉도를 거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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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독도 동도에 들어가 조사활동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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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慶尙北道 鬱陵島 南面 獨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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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독도)’라는 푯말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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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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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독도에 설치한 최초의 영토 표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6월 25일 일본수산시험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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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정박해 이 푯말을 뽑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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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한일회담에 대비해 조선산악회의 후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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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1948년 8월 15일 개칭)에 독도 조사를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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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는 탐사대를 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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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15일 독도에 들어가 조사활동과 독도 표석을 세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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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도 인근에서 미군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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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연습을 하고 있어 독도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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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년 2개월 뒤인 1953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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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는 해군함정을 타고 독도에 상륙했다.
독도에 내린 조사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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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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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세운 푯말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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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세로 각 60cm, 45cm의 화강암 표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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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산악회가 세운 최초의 표석이자 ‘독도 1호 표지석’이다.
표석의 앞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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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獨島/ LIAN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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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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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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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 ALPINE ASSOCIATION/ 15th AUG 1952’라는 글귀를 새겼다.
그러나 이 표석은 이후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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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을 세운 지 일주일 후인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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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상보안청 요원들이 독도에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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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석을 뽑고 또다시 다케시마 푯말을 세운 것이다.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 독도 표석 복원]](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5/09/01/2015090101790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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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세 번째 표석 재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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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북도와 한국산악회는 2005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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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주년을 맞아 표석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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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일본 시마네현이 2월 22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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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등 도발을 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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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두 번째 표석은 2008년 8월 슬그머니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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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일본인의 손이 아닌 우리의 자발적인 철거였다.
2008년 ‘리앙쿠르(Liancourt)’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이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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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은 2005년 복원한 표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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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에 통고도 없이 철거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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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에 ‘LIANCOURT’라는 글귀가 들어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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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이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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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앙쿠르는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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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에서는 이 배의 이름을 따 독도를 리앙쿠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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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기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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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적 명칭을 사용한다는 핑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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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에 ‘리앙쿠르’란 이름을 퍼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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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산악회의 독도 표석은 빈 공간으로 방치되어 왔다.
한국산악회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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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독도 표석을 재건립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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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표석위원회를 구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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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독도 동도 자갈마당에 표석을 설치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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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 현상변경을 신청해 허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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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336호)인 관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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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물 등을 설치하려면 사전에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번에 재건립된 독도표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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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유학재 이사, 영화감독 박준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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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이자 문화재보수 기능보유자인 김동관 회원이 제작팀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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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6월 28일부터 울릉도 서면 남양리 비파산 주상절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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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으로 쓸 조면암(粗面巖)을 채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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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세운 최초 표석과 동일한 크기로 표석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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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표석이 화강암인데 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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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조면암으로 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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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의 ‘독도의 암석과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설치조건에 따른 것이다.
표석 전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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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 獨島 / DOKDO KOREA’라는 글귀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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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최초의 비석에 새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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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NCOURT’ 대신 ‘DOKDO KOREA’로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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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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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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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표석을 세우려 했던 날짜인 ‘1952. 8. 15’를 한글과 영문으로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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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는 제막식에 앞서 6월과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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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독도를 방문해 미리 표석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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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기 감독은 표석 제작과정부터 설치, 제막식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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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막식에 참석한 참가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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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새벽, 서울과 포항에서 출발해 강릉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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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항에서 다시 쾌속선을 타고 2시간 40분을 달려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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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저동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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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사동항으로 가 쾌속선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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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독도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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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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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독도는 그렇게 가깝고도 먼 섬이었던 것이다.
파도가 거칠어 좀처럼 접안이 어렵다는 독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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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만큼은 푸른 하늘과 잔잔한 파도로 길을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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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은 독도 동도 자갈마당(몽돌해변)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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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에 참석한 160여 명의 한국산악회 회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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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 모여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독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30분 정도로 한정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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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은 장승필 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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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을 덮은 천을 내리는 것으로 짧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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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이동한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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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다시금 한국산악회가 표석을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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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우리 땅임을 재확인하는 시간이기에 모두의 얼굴은 만족스러웠다.
서울 성북구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참석했다는 김인식(55)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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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회원으로서 표석 재건립은 무척 기쁜 일”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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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과 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인 올해 독도를 방문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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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에게는 잊히지 않을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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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두 번째로 찾았다는 오명일(63)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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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가 독도에 표석을 세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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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후 그것이 없어진 줄은 몰랐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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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빈자리를 채우게 되어 다행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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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임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짧은 제막식이 끝나고 기념사진 몇 장을 찍을 시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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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선은 다시 울릉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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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자그마한 창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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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독도에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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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회원 등 160여 명은 울릉도로 돌아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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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까지 울릉도 성인봉 산행과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산이 지키고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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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 독도 표석 복원]](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5/09/01/2015090101790_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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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창립 70주년 독도학술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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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와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가 주최하고 -
동북아역사재단이 주관한 창립70주년 기념 독도학술대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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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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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에는 한국산악회 장승필 회장, 박종한 부회장을 비롯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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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남선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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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홍성근 박사 등이 참석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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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회원과 학술대회 관계자 200여 명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장승필 회장은 인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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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산악회 선배들은 독도에 상륙해 일제의 뿌리를 뽑아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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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한국의 영토임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이정표를 세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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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인식하게 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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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한국산악회의 독도상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한 부회장은 기조연설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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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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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를 파견한 1947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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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우리 땅임을 선언하고 재차 확인한 해로 역사에 남아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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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의 독도 답사는 단순한 학술조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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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토에 대한 소유권 선언과 실천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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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박 부회장은 “한국산악회가 지키고 탐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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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동해의 작은 섬 독도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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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연설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발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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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김호동 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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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접근-한국산악회 활동의 역사적 평가’란 주제로 발표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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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해양법학회 박현진 교수, ‘법률적 접근-한국산악회 활동의 국제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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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대학교 송호열 교수, ‘지리적 접근-한국산악회 활동의 지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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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신순식 독도정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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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적 접근-1945년 이후 경상북도의 독도행정과 정책’을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를 마친 이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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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정병준 교수, 세종대학교 교양학과 호사카유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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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이 토론자로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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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들과 함께 종합토론 및 강평을 진행했다.
이날 발표대회를 통해 참석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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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가 1947년 8월 16일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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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으로 일제가 식민시기와 광복 후까지도 자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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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법행위를 공식 조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
이후 우리 정부와 국민들,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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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임을 인식하고 정책을 구상하는 데 있어
-
중요한 이정표 구실을 했다”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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