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어딜 가서든 지고 오는 법이 없었다. 샘도 많고 욕심도 많고 기운도 넘쳤다. 나는 짱돌처럼 단단한 표정을 하고 동네를 쏘다녔다.
또래 아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새침데기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어른들은 “아이고, 저 범띠 가시내!”라며 혀를 쯧쯧 찼다.
나는 호랑이띠. 삼신할머니가 호랑이 꼬리털 한 오라기 떼어내 아직 덜 만들어진 내 등뼈 중간쯤 가져다 대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놓았다는 얘기다.
그다음 나를 안아다가 우리 엄마 배 속에다 가만히 누였던 것이지. 그러니 호랑이 꼬리털 유전자를 등뼈에 묻힌 내가 용맹한 새끼 호랑이로 자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나는 호랑이의 후예라도 된 양 매사 도도했다.
놀랍게도 나는 무럭무럭 자라 물러터진 여자가 되었다. 삼신할머니가 붙인 게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의 꼬리털이었나. 지금의 나는 노란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하품 끝에 꾸벅꾸벅 조는 고양이와 훨씬 닮아있다.
어쩌면 호랑이는 그렇게 용맹한 녀석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장 동화책만 보아도 그렇다. 동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들은 우습기 짝이 없다.
팥죽 한 그릇 얻어먹으려다 할머니에게 혼쭐이 나고, 오누이를 잡아먹으려던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가 수수밭에 떨어진다.
영리한 강아지는 몸에 기름칠을 하고 줄을 감았다. 호랑이는 그것도 모르고 강아지를 꿀떡 삼키지만 금세 뒷구멍으로 쑥 빠져나간다.
그렇게 강아지가 호랑이들 배 속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어라, 호랑이들이 줄줄이 줄에 꿰었네. 호랑이가 정말 용맹했던 적이 있기는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옛날 옛적 곰에게도 졌잖아. 고작 마늘 먹기 싸움에서.
아이를 데리고 일 년에 한두 번쯤 호랑이를 보러 간다. 그들은 어슬렁어슬렁 걷거나 바위 위에 앉아있거나 까부는 새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사납게 포효하는 호랑이를 본 적 없다. “호랑이 안 무서워?” 물었지만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는 흥, 코웃음을 쳤다. 시시한 호랑이를 보고 온 아이는 다시 집 앞 놀이터로 뛰어나갔다.
우리 집은 2층, 놀이터 바로 앞이다. 단지 내 놀이터 열 곳 중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이라 아이들에게 최고로 인기가 좋은 곳이다. 나는 창을 열고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았다.
뛰고 구르고 다들 야단이다. 미끄럼틀에서 데굴데굴 굴러내려오는 저 아이는 새끼 곰 같고 그네에서 겁도 없이 뛰어내리는 저 아이는 새끼 원숭이 같다.
우리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쌩쌩 달리는데, 폭주족 다람쥐다. 어느 시절의 나 같아서 가만히 보다 웃음이 터졌다. 딱지치기를 하던 아이 둘은 끝내 싸움을 벌였다.
망아지 두 마리 엉겨붙은 것 같다. 저 아이들이 다 자라 나처럼 물렁물렁한 어른이 되는 걸까? 야생의 경험은 기억 속 어딘가에 묻어두고 말끔한 얼굴로 우아한 척하며 살게 되는 걸까?
나른함과 고독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말이다. 도톰한 점퍼 속에 폭 파묻힌 병아리들은 고작 시소가 재미있다고 까르륵까르륵 웃어댄다.
어디 나처럼 눈 땡그랗게 뜨고 짱돌 같은 표정을 한 새끼 호랑이 한 마리 없나 둘러보는데 아하, 올해 새끼 호랑이들이 꼬물꼬물 태어나겠구나.
봄쯤 되면 모자를 눌러쓴 새끼 호랑이들이 유모차에 실려 나올 테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아장아장 걸음마도 하겠구나.
넉넉잡아 3년이 지나면 제법 건장해진 새끼 호랑이들이 놀이터를 장악하겠다. 아직도 백두산엔 호랑이가 살고 있을 거야. 유리문 안 호랑이들과는 달리 목소리도 우렁차고 용맹하기 그지없을걸.
조선일보
'2021~2025세상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달라지는 것들 (0) | 2022.01.02 |
---|---|
단군 신화부터 호돌이까지.. 두려우면서도 친근한 존재 (0) | 2022.01.01 |
한국호랑이 오둥이 기운 받아 2022년 건강하고 힘차게! (0) | 2022.01.01 |
[임인년 세시기] 2022년 검은 호랑이 해.. 용맹과 해학의 상징 (0) | 2022.01.01 |
임인년 호랑이해 근하신년 (0) | 2022.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