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紹修書院)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했다. 이 시기의 서원은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황은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했다.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주숙수사지당간지주(榮州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제59호로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숙수사가 있던 자리로
고려 때까지 존재하다
소수서원의 건립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간지주의 위치는 원래의 자리로 보인다.
높이는 3.65m이고 2개의 지주가
0.59m의 간격을 두고 동,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안쪽면은 조각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중앙에 능선의 종대를 조각하였으며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는데
맨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으며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쳤던 받침돌은 거의 다 없어졌는데
원호(圓弧) 1단을 도드라지게 새긴 긴 댓돌만 남아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인데
지주의 높이에 비해 가늘고 길게 가공되었고
각 면의 조각도 세련되고 단아하게 새겨져 있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작이다.
죽계수(竹溪水)
소수서원 입구에는
멀리 소백산 초암계곡에서 발원한
죽계수가 흐르고 있어 운치를 돋우고 있다.
취한대(翠寒臺)
취한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대(臺)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허물어져 그 자리에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는데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詩)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엣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를 따옴
경자바위[敬字岩]
경렴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는
주세붕이 쓴 '경(敬)',
이황이 쓴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다.
경렴정(景濂亭)
소수서원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경렴정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죽계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경렴정'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 주돈이(周敦頣)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빌어 왔다.
성생단(省牲壇)
향사에 쓸
희생(犧牲)을 검사하는 단(壇)으로
생단(牲壇)이라고도 한다.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강학당(講學堂, 명륜당 明倫堂)
보물 제1403호로
서원의 양대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중종38년(1543년)에 군학사를 옮겨온 것이며
정면 4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겹처마의 단층 목조건물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고 세운 건물이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툇마루 가장자리에는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는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으며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로 사용하고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으며
기단의 3면(정면, 우측, 좌측)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일신재와 직방재
일신재는 일반 교수들의 숙소이고,
직방재는 원장님의 숙소로서 동재와 서재라고 한다.
동재는 일신재, 서재는 직방재로,
양재가 한 채로 되어있다.
평면은 정면 6칸, 측면 1칸반,
기단은 앞면은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쌓기]로 했고
후면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진 돌로 [바른층쌓기]를 했다.
복판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
방 앞엔 각각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명륜당은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
오늘날의 학생 기숙사로서
동서재의 동쪽 조금 뒷편에 동남향으로 자리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막돌 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이다.
복판칸은 개방된 마루가,
좌우에 온돌방이다.
신재(주세붕)의 문인 송간 황응규가 세웠다 한다.
일영대(日影臺)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으며
맑은 날 윗 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하는데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영정각(影幀閣)
영정각 안의
오른쪽 안향의 영정은
고려 충숙왕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리게 했던 것을
조선 명종때
다시 그린 것으로 국보 제111호이고,
가운데 모셔진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는
공자를 향하여 여러 성이과 제후들이
모셔 앉은 그림으로 보물 제485호이며,
그 왼쪽의 주세붕 영정은
보물 제717호이다
주자학의 비조인 주자 영정(좌측) & 국보 제111호인 회헌 안향 영정(우측)
보물 제717호인 신재 주세붕 영정(좌측) & 한음 이덕형 영정(우측)
미수 허목 영정(좌측) & 오리 이원익 영정(우측)
전사청(典祀廳)
제향을 준비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건물로
제수용품을 마련하고 보관하던 곳이다.
장서각(藏書閣)
장서각은
오늘날의 교내 도서관으로서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하신 어사 내사본을 비롯
3000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좌우 지선의 예를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숙소 우측에 있다.
관서대(盥洗臺)
관서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대이다.
정료대(庭燎臺)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의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문성공묘(文成公廟)
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제향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주향(主享)으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게 봉안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었다.
※ 현재 보수공사중으로 출입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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