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2018 해외여행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쓰시마히타카츠 까지(2018.02.10)

장 불재 2018. 2. 12. 15:25


prologue


작년 12월 9일부터 시작된 감기가

해(年)가 바뀌어 만 2달이 된 어제

즉, 2월 9일에야

 감기에서  90%는 벗어나는 것 같다.


12월중순부터 1월중순까지 한달간이

나에게는 방학과 같은 기간이라

원(願)업시 山行을 하려고 하였으나


감기로 인하여 6회밖에 산행을 못했는데

그것도 2회는 중도포기하고 2회는 코스단축하여

제대로된 산행은 2회밖에 되지 않는다.


감기에서 벗어난 기념(?)겸

그리고 금년 일년을 위한 기분전환겸 해서

대마도 답사한지 1년9개월만에

 지인들과 함께 다시 대마도 1박2일 여행에 니선다.


1년9개월전 다녀온 코스 그대로. . . . . 


〓 〓 〓 〓 〓 〓 〓 〓 〓 〓 〓 〓 〓 〓   



대마도(對馬島 : 쓰시마)



쓰시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 미쯔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쯔시마)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2741281년 두 차례

몽골군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조선의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대마도의 수비가 완강했고

복잡한 지형의 현지사정에 어두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는 소 요시토시였으며

그의 장인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시대 말기까지 대()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한

이예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에 소재한 엔추지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과 부사 박세양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