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 – 43 천반산 (전북 장수군, 진안군)
♣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恨이 서려 있는 천반산(天盤山)!
☞ 때 : 07. 26(화) (맑고 무더운 날)
☞ 흔 적 : 천반산휴양림 →천반산 →천반산휴양림
☞ 시 간 : 09:28 ~ 11:11 (01시간43분, 휴식포함, 본인기준)
☞ 거 리 : 약3.0km
☞ 참 석 : 새전북산악회
천반산(天盤山)
전라북도 진안군의 동향면 성산리와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647m).
동향면의 8경 가운데 하나이다.
산의 주봉 서쪽에 옛 성터가 있으며,
그 아래에 송판서굴과 할미굴이 있다.
산성의 둘레는 약 2,000m이며,
상당량의 옛 기와편도 수습되었다.
산의 형태가 소반처럼 생겨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광여도, 해동지도, 지승 등에는 천반산이 아닌
'천방산(天方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진안)에는
'천방산(天防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천반산의 원래 지명은
천방산으로부터 변형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진안군사에 의하면,
정여립(1546~1589)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옛 성터에서 관군과 싸웠고,
은신하기도 한 곳이라고 하며,
'천반옥저(天盤玉箸) 하선선인(何羨仙人)'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정여립에 관한 아래의 글은
2012-32 천반산(6월6일)에 기재하였던 것을
다시 한번 게재하니 양해 바랍니다.
천하가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있으리요.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을
물줄기가 감아 돌아가는 이 곳 죽도는
정여립 사건의 대미를 장식한 역사의 현장이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 이후
반역의 땅으로 남아야 했던 전라도.
우리는 전라도 사람으로서,
이 사건의 올바른 진상을 파악하고
우리들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여립이란 인물과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정여립의 한 품은 천반산
1589년 10월 2일 황해 감사 한준이
정여립의 모반 음모를 내용으로 하는
비밀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렸다.
이에 평소 도전적인 자세의
정여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선조는
한밤중에 삼정승 이하
옥사를 다스릴 벼슬아치들을 불러들였다.
선조는 삼정승에게 정여립에 대해 물었다.
"정여립은 어떤 인물인가?"
영의정 유전과 좌의정 이산해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하였고
우의정 정언신만이
"신은 오직 그가 글을 읽는 사람인 줄로만 압니다."라고 아뢰었다.
선조는 화를 내면서
한준의 비밀 장계를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고,
이어 대신들은 정여립을 체포하고자 청하였다.
선조는 즉각 이를 허락하고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의금부 도사들을 모반지역으로 급파했으나,
여립은 그의 하수인인
안악의 변숭복에 의해 이 사실을 눈치채고
그의 아들 옥남,
그리고 동반자인 박연령의 아들 춘룡과 함께
죽도의 천반산에 숨어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피한 터라
동네에서 밥을 빌어먹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를 수상히 여긴 동네 사람이 관아에 알리자,
진안현감 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와서
정여립 일행을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대동계를 조직해서 변혁을 꿈꿔온
모든 시간들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
정여립은 칼을 빼내 변숭복을 치고,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리쳤다.
그리고 나서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러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여립은 도망과 자결로
오히려 역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이발'을 비롯하여
무려 천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니
이것이 바로 기축옥사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첫 공화주의자 정여립
정여립은
동래 정씨 희증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다.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는데,
명종 22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2년에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이에 일세의 이목이
정여립에게 집중되고 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이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는데,
본래 서인이었나 이이가 사망하자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배반하고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하여
여립의 배신을 공격하고
이 상소에 의해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샀다.
상소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어
마침내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선조 20년의 일인데
이로 인해 당시 동인이 쥐고 있던 삼사의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간 해이기도 하다.
여립이
서인을 공격하게 된 연유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동인 사이에는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를 찾아 인사했다 하고,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여립은 그 후 진안 죽도 천반산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시회를 여는 등 날로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이들은 임진년에 있을 변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이의 뜻에는 동감하여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정해 왜변이 발발하였는데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의해
정여립의 대동계 무사들이 동원되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훗날
여립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은
이 대동계가 불측한 일을 위해 조직되었다 하여
모반 음모로까지 연결지어버리지만,
오히려 호국정신이 깃든
우국충정의 단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어쨋든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해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잡혔다.
이 때 정여립은
변숭복이 이 사실을 알려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오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는 거의 제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명에 숙청된 이들은 천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의 반사건으로
그의 진보적인 사상과 혁명성은
역모라는 이름 하에 묻혀지고 말았다.
조작설
정여립이 모반을 계획했고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단한 번의 저항도 없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최후를 맞이하였을까?
정여립 사건은 서인에 의해 이루어진 모함으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참설에 전해져 오는
'여립이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여
책망을 듣게 한 동네 아이를 죽였다.' 는 이야기나
'어릴 적부터 제비나 찢어 죽이는 잔인한 인물'이었다는 등의 구전은
그의 모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립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각종 서신 문서들을 집안에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동인의 무리들을 죽게 할 리 없다.
또 급보를 받고 도망간 곳이라면 과연 죽도를 택했을까?
이미 그는 죽도를 자주 찾아 '죽도 선생'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세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깊은 산을 두고도 연고지를 택했을까?
또 한가지 의문이 있다면 정여립의 자결이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치고 나서
칼자루를 꽂아놓고 목을 칼날에 대고 찔렀다 하는데
그 동안 관군들은 구경만 했단 말인가?
<동소만록>같은 야사에서는 '여립이 진안 죽도로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살해한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 고 전해지는데,
기축옥사의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서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정철이 그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최고 지휘자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는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지휘한 노비 출신의 송익필이 있었는데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이 송익필이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명을 환천시키고자 했으나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이 이를 반대하자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작에 동참한 것이라 보여진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 모반사건을 조선후기를 얼룩지게 했던
당쟁의 역사에 도화선 작용을 한 사건으로 보고,
정여립을 당쟁의 희생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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