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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야기 마지막회 ㅣ등산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은

장 불재 2024. 10. 24. 16:29

 l 필자 김경수 ㅣ경승산악회 창립회원, 대한 산악연맹 학술편집위원, 제6회 산악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한국스토리문인협회 소설동인회장, 네팔 메라피크(6,450)등정, 일본 동계북알프스 2회 등반 등산악활동과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


 

등산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끊임이 없지만 등산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고들 한다. 그래서 본격적인 등산 시즌을 맞이하여 등산 관련 통계를 통하여 등 산인이 원하는 정보를 정리하여 이를 제공하려 한다. - 편집부

알피니즘에 따른 사조思潮  의 조망


등산을 이해하는데는 그 유래와 시대적 변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은 인간에게 종합적 기량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성취에 대한 보답은 없다시피하다.

 

특히나 자본주의적 잣대로 보면 등 산만큼 무가치한 행위는 없다. 다시 말해 근대등산이 시작된 것은 순수한 발로에 의해 시도된, 즉 무상의 가치를 추구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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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쉽고 편하게 말하면 근대 등산은 ‘먹고 놀다보니 할 일이 없어서’ 시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근대등반의 시초로 꼽히는 프랑스 몽블랑 등정(1786년)부터 시작된 알프스 초등반시대는 당시 유한 그룹(할일없는 귀족이나 퇴역군인, 의사나 변호사 등)이 선도하였고 그들은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지고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동기가 뭔가를 보답받기보다는 순수한 명예, 그 자체를 우선시 했던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알피니즘(알프스 산맥을 무대로 형성된 근대 등산이념)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행위로 인식되며 자연과 스스로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게 하였다. 


따라서 등산에 대한 인식,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근대등반사조, 즉 알피니즘은 정상을 향하는 순수한 성취의식을 제외한 다른 무엇 도 그 목적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탐사나 학술조사, 촬영이나 심지어는 ‘건강을 위해서’ 산에 간다면 그것은 알피니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시과시욕이다. 


내가 남보다 이만큼 잘한다는 자만심이나, 내가 이런 것을 하니까 특별하다는 의식같은 것이야 말로 순수한 등산정신을 좀먹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단지 정신적 폐해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로 나타나거나 ‘등산’이라는 순수한 가치를 실현나가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 으로 매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알피니즘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불확실한 세계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다.
둘째 자신의 한계에 대한 시험이다. 
셋째 자연과의 친화력을 도모하는 것이다.
넷째 함께 동행하는 동료들과의 인간애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부가적인 가치들이 더 있을 수 있으나 위의 네가지만 기억해도 알피니즘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등반적 사조에 대한 총체적 접근은 보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야 하기에 여기서는 그 시대를 선도했던 조류들의 맥을 짚어보 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1)가이드 등반 - 어쩔 수 없는 선택 


등반태동기 이전의 알프스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목축업을 하거나 산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알프스 산군을 올라 다니는 정도였으며 이들도 꼭 생업이 아닌 이유로 산을 올라 보는 것은 일종의 호기심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물론 그런 알려지지 않은 사람 중에 지금 정리된 알피니즘에 입각한 순수한 발로로 인하 여 위험한 산행을 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도 없고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따질 수 없으므로 그런 선도적인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추측하면서 그 이전 시대의 등반활동을 접어둘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은 한국등반의 메카로 불리우는 인수봉에 대한 초등기록이 불투명하다는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인수봉을 올랐다는 가장 오랜 기록은 1929년 영국인 아처와 일본인으로 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처는 자신이 인수봉에 올랐을 때 사람이 쌓은 돌무더기를 보았다고 했으니 초등자는 있으나 누군지는 알 수 없는 경우라 하겠다.


그런 상황에서 앞서 말한 유한그룹들이 알프스의 봉우리에 발을 들이고 싶어도 접근로나 산에 대한 정보를 모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초창기에는 알프스를 잘 아는 사람들을 가이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향후 히말라야 등반에서도 현지의 셀파족을 가이드로 삼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즉 단지 산을 오르겠다는 동기부여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지식인들이 움직이며 근대등반의 철학과 정신세계를 열었다면, 현지에서 고용된 가이드는 길잡이 역할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수준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이러한 등반방식은 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머지않아 전문적인 ‘산악인’이 생기면서, 그리고 최초의 산악단체인 ‘영국산악회’가 만들어지면서 가이드를 대동한 등반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2)가이드 레스 등반 -산악인의 온전한 몫으로


알프스 산군에 대한 등반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등반방식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알프스의 봉우리에 대한 본격적인 등정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대를 이른바 ‘알프스 초등정 황금시대’라 부른다. 또한 지금은 지양해야할 표현이지만 ‘처녀봉’(아무도 오르지 않은 봉우리를 지칭, 지극히 서양·남성 중심적 표현, 이후 미답봉이라 칭함)이라는 표현도 이때 생겨났다.

 

즉 초등정에 대한 가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을 초등자대열에 올리려는 경쟁이 하나의 지류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초등정 황금시대는 당시 가장 등반성 이 높았던 마테호른을 1876년 에드워드 윔퍼가 오름으로써 알프스 산맥에서는 더 이상 오를 미답봉이 없어져 끝나게 된다. 


그러한 등정열기가 피어나던 시기에 가이드를 배제한 순수 산악인의 힘으로만 오르자는 사조가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새로운 등반방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즉 자신의 힘으로만 미지의 산을 올라야 한다는 알피니즘의 사조가 산악인들의 정신세계에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3)디렉티시마 -직등주의, 중력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장


알프스에서 더 이상 오를 봉우리가 없어지고 영국이 주도하던 산악활동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등반 기술과 등반장비가 개발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향상은 이미 오른 봉우리라 할지라도 보다 험난하고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직벽에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등반에 대한 가치판단이 ‘처음’이라는 일회적 개념에 머므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역동적인 의미부여를 필요로 한 것이며, 이 시기를 ‘알프스 은의 시대’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직등주의를 디렉티시마라 부른다. 


이 당시에는 인공등반기술이 이를 선도하였고 록햄머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하켄, 봉봉, 우드락 등 확보장구들과 레더와 같은 장비들도 아울러 개발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등반-절벽에 일직선의 선을 그어 따라가는 오름짓-에 대해서 한편으로 비판이 없지도 않았다. 등반이 무슨 곡예사들이 하는 아크로바틱(곡예)이냐는 비아냥과 그러한 단순함에 대한 무의미성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다소 무리는 있다고 보여지지만 당시에 불가능하다고만 여겨졌던 오버행 등반마저 인간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만 해도 센세이 션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고 본다.

 

아울러 그러한 실험정신은 보다 전위적인 등반의 길을 열어준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4)머메리즘 -알피니즘의 절정, 그리고 사회전반에 던지는 화두

 

근대등반이 하나의 시대적 사조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할 때 산, 특히 등반에 관한 책들이 쓰여지면서 등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당시의 등반가들이 자신들의 등반철학을 하나의 이슈로 던지면서-심지어 프로이스는 확보없이 등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추락사할 정도- 어떤 방식이 가장 뛰어난 것이냐는 담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때 영국의 등반가 머메리는 ‘가치있 는 등반은 보다 어려운 루트를 선택하여 오르는 것에 있다’는 폭탄 같은 선언을 한다. 여기에서 ‘폭탄같은’이라는 표현은 정상을 오르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고정관념을 깬,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등로주의냐, 등정주의냐는 설전을 낳았으며 비단 등반의 세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이나 사회 전반에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킬 때 비유되는 하나의 통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 등반사조, 즉 알피니즘은 어떤 측면에서는 머메리즘을 이해 하느냐,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오도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왜 산에 오르는지, 특히 암·빙벽등반과도 같은 전문적인 분야를 선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한번쯤 생각해 볼 화두가 아닐까 싶다. 


이때 즈음에 등반계는 보다 시각을 넓혀 알프스가 아닌 더 극단의 산들,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영국을 필두로 선진 강국들이 앞을 다투어 자국의 영예를 드높이고자 히말라야 원정대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바아흐로 ‘히말라야 초등정 황금시대가 열린다.


(5)슈퍼 알피니즘 -불가능에 대한 도전, 인간한계에 대한 도전 

 

히말라야산맥은 세계의 지붕으로 일컬어지며 해발 8천미터가 넘는 산군(山群)이 14개가 있는 곳이다.

 

(보다 정밀하게 독립산군으로 나눈다면 16개, 전위봉까지 모두 포함하면 26개) 알프스에서 등반활동이 임계점에 이르자 산악인들은 누가 먼저 8천미터의 봉우리에 자국의 깃발을 꼿는가에 총력을 기울인다.

 

여기에 프랑스가 최초로 8천미터급 봉우리인 안나푸르나초등정에 성공하고, 1953년 영국이 세계 최고봉인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영국의 경우 정찰 등반까지 포함하여 30여년간 9차례에 걸친 원정대가 도전하면서 죽음의 지대(7천미터 이상의 고도에서는 인간의 생리활동이 불안정해 지면서 48시간 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하여 그 이상의 고도를 이르는 표현)에 대한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게 된다. 


이러한 불가능에 가까운 등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등반장비의 혁신적인 발전에 있었다.

 

프랑스의 에르조그 원정대가 시도한 나일론소재의 등반복은 방수성능 및 중량감소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입증했고, 7천미터 이상에서는 산소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으로 죽음의 지대를 돌파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에는 첨단의 등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 시도되었다. 바로 이태리 티롤지방 출신인 라인홀트 메스너에 의해서이다.

 

그는 1977년 당시 의학계가 8천미터 이상에서 인간이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발표한 통념을 깨고, 단독으로 무산소 초모랑마등반을 시도했고 등정에 성공하여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

 

등반방식에서도 베이스캠프(BC)에서 5~6개의 전진 캠프를 치고 최종 공격캠프에서 머물다 정상등정을 시도하는 시지어택방식(극지 등반법, 남·북극 원정 시 시도된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어택베이스캠프(ABC)를 가능한 한 높이 치고 중간 캠프없이 비박을 시도하여 정상을 치고 내려오는 러시어택방식(알파인 스타일이라고도 함)을 성공시켜 등반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이후 히말라야 동계 등반(당시 히말라야에서는 엄청내리는 몬순기간과 영하 40 도밑으로 내려가는 동계기간은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었음)이 시도되었고 알프스에서는 아이거를 3시간대에 등정하거나 3대북벽(아이거, 마터호른, 그랑드조라스)을 당일(24시간 : 등정후 이동은 헬기를 이용)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조를 슈퍼 알피니즘이라 부른다.


(6)익스트림과 열린 모험의 세계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 그리고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주무대로한 등반의 무수한 시도는 ‘등반’, 그 자체만으로 한계상황이 정점에 이르면서 다른 분야들과의 접목으로 다양한 도전이 계속된다.

 

이른바 퓨전 알피니즘(필자가 만든 신조어)이라고나 할까.


히말라야 8천미터급 봉우리를 등정하고 바로 스키를 이용하여 직활강을 시도하는 경우나, 초모랑마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시도하는 등 등반행위뿐만 아닌 다른 분야를 동시에 시도하면서 그 분야의 기록을 갱신하는 전위적인 도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추세이며,

 

한편으로는 극지횡단과 정글탐사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탐험 가, 혹은 모험가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이 하던 것을 고산등반까지 마친 등반가들이 더 험난하고 더 빠르게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 마저 알피니즘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미지의 세계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알피니즘의 무대가 꼭 산에 국한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상상 초월’이라는 그 상상을 뛰어넘는 도전. 아마도 그 끝은 지금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는 조망

 

근대등반이 꼭 순수한 의도로만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등반의 대상지가 멀고 척박하며 그에 따라 등반대의 규모도 커지는 문제가 발생하며, 이때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에 등반가들은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따라서 알프스 산맥을 위주로 활동 하던 유럽의 산악강국은 그 눈길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히말라야 산맥이나 힌두쿠시 산맥 등으로 그 대상지를 넓히는데, 이로 인하여 소위 ‘명분’과 ‘돈’이 등산활동과 얽매어지는 결과를 보여준다.

 

 

(1)국가패권주의 주도적 등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 전후패망에 대한 희망, 개도국의 국위선양

 

알프스의 4천미터급과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은 그 높이만 다른 것이 아니라 등산대상지까지 도달해야하는 과정이 말 그대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시지어택의 경우, 히말라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정찰등반을 위시해서 등반계획을 짜고 보급 및 등반 장비를 챙겨야 한다. 현지에 도착하여 셀퍼나 포터, 쿡을 고용하여 카라반을 꾸리고 최소한 15일~20일 이상의 여정을 소화해야 한다.

 

또한 베이스캠프를 치고 중간 공격캠프를 여러개 확보하면서 물자를 올려 비축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리고 등반에 최적한 기상을 확보하기 위해 한 달여를 머물러야 한다.

 

이렇게 등반을 시도하고 최종적으로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고 나서 귀국하는데는 대충 3개월의 시일이 소요된다. 


1950년대에는 그러한 대규모의 등반대를 개인이 사비를 털어 준비하기에는 세계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마땅히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 세계 오지를 탐험하며, 경우에 따라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국가적인 측면에서 세계진출을 장려하고 지원하였기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초등정하는 것을 국가적 이벤트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취지에서 앞서 설명했듯이 수차례의 고전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초모랑마에 유니온 잭을 꽃는데 성공하였고, 독일은 이에 질세라 낭가파르밧에 자국의 국기를 꽃아 산악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세웠던 것이다.

 

이에 앞 서 프랑스의 안나푸르나 초등정 등 당시의 산악활동은 국가가 지휘하며 서로 자국의 ‘국기꽃기’에 열을 올렸고 메스컴을 통해 이를 빅 이벤트로 만들고, 이를 수행한 산악인들을 ‘국가영웅’으로 칭송하며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그 와중에 마나슬루는 이차대전에 패망하고 실의에 빠졌던 일본이 야심을 가지고 초등을 목표로 삼은 케이스이다. 이들은 등반의 성공을 위하여 알루미늄사다리를 동원할 정도로 엄청난 준비를 하였고, 이 등반의 성공은 기념우표를 발행할 만큼 축제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영국인이 에베레스트가 영국의 산이라고 생각하듯이 일본 인은 마나슬루를 일본의 산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1977년 고상돈 등반가에 의해 초모랑마가 등반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적 이슈로 다루어지며 다른 스포츠 영웅처럼 그도 카 퍼레이드를 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올림픽에서의 메달처럼 세계 최고봉의 등정은 국위선양이라는 기치로 한동안 히말라야등반은 국가적 사업으로서 그 명맥을 이었다.


2)상업지원에 의한 등반 기업체의 홍보(산악장비, 의류 및 언론기관) 상업등반 프로 산악인

 

국위선양이라는 거품이 조금씩 빠져나가면서 히말라야 등반은 한풀 꺽이는 듯 했으나, 그 자리를 등산장비 스폰서가 후원하는 상업지원에 대한 등정경비를 부담이라는 케이스를 라인홀트 메스너가 만들었다.

 

히말라야 등반은 정상에 자국의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등반장비 메이커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찍는 새로운 마케팅이 선을 보였다. 


비단 등반업계가 아니더라도 언론사나 학교재단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통해 대규모 등반이 시도되었다. 허영호 등반가가 한국일보의 지원을 받았다든가 박영호 등반가가 동국대학교의 후원을 받은 것들이 그 사례이다.


또한 히말라야 등반을 전문으로 했던 산악인이 개인들에게 등반비를 받아 초모랑마 등반팀을 꾸리는 경우도 생겨났기에 이제는 ‘돈’ 만 있으면 8천미터 고지를 오를 수 있다는 통념이 자리잡고 이를 반증하듯 몇 해  전 초모랑마 정상부근에 등산인들이 줄을 지어 ‘정체현상’을 담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사례조차 있었다.

 

(3)히말라야 14봉 레이스 -알피니즘이라기 보다는 상업언론의 활개

 

통상 히말라야 등반은 8천미터급 하나만 올라도 그 위상은 대단하게 평가되었다. 그런데 1970년부터 1978년까지 히말라야 8천미터급 14봉을 모두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에 의해 다른 등반가들도 이를 새로운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이 당시 폴란드의 예르지 쿠쿠치 카와 누가 먼저 14봉을 완등하냐는 것을 두고 세계의 매스컴은 이를 스포츠 중계다루듯 화제로 올렸고 이를 ‘히말라야 14봉 레이스’ 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다.

 

물론 메스너가 먼저 목표를 완수하였지만, 과연 등산을 경쟁으로 묘사하는 것이 올바르냐는 것은 오늘도 생각해야 할 여지가 많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 히말라야 등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어서 여성 등반가중 누가 히말라야 14봉을 완등하느냐는 것으로 포커스가 바뀌었다.

 

당시에 주목받던 여성 등반가로 K2를 처음 오른 폴란드의 반다 루트키에비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1992년 9번째 8천미터급인 캉첸중가에서 실종되어 야심차게 시작했던 14 봉완등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블랙야크가 후원하는 고은선 등반가와 코오롱에서 후원한 고미영 등반가가 서로 누가 먼저 오르냐는 것으로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나, 낭가파르밧에서 등정 후 하산하는 과정에서 고미영 등반가가 실족사함으로써 레이스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은선은 남은 안나푸르나를 올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히말라야 14봉 완등자로 기록되지만 경쟁자이던 스페인의 파사반이 오은선의 칸젠중카 등정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현재 등정으로 공인되지 않고 ‘논쟁 중’인 상태이다. 


지금은 23명 이상이 14봉을 완등하였기에 ‘완등’ 자체는 이슈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 얼마나 빨리 완등을 마쳤느냐는 경쟁이 새로 열렸다.

 

과거 10여 년이 걸리던 14봉 등정을 산악인도 아닌 네팔출신의 푸르자가 2019년에 7개월도 안되어 모두 올랐고, 2023년에는 노르웨이 여성 산악인 하릴라가 91일 만에 완등하는 기록을 세웠으므로 이 또한 어디까지 레이스로 이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4)등로주의와 등정주의-알파인 스타일, 시지 어택과 러시 어택

 

등산의 대상지가 ‘높은 곳’을 오르는 경쟁이 더 이상 높은 곳을 오를 데가 없다는 상황에 이르자 등반가들은 머메리즘에 입각하여 더 어려운 루트를 통해 오르는 ‘등로주의’를 가치있는 등반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정상을 오르는 ‘등정주의’가 쉽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전위적인 등반을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 ‘등로주의’라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는 것이며, 어느 쪽이든 등산에서 가치를 매기는 일은 의미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을 대비할 수 있는 케이스로, 앞서 말한 라인홀트 메스 너와 예르지 쿠쿠치카의 차이를 살펴보면 조금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쿠쿠치카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동안 8천미터급 17개를 완등하고 로체남벽에서 자일이 끊어져 사망한 비운의 산악인이다.

 

그는 동구권에서 활동했던 탓에 상업적인 후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어려운 등반을 이어왔다. 로체를 제외하고 노멀루트가 아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오르거나 단독으로 또는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동계에도 등정하면서 8천미터급을 연속으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특히 악명높은 안나프루나 남벽에 새 루트를 내기도 하였다. 그가 14봉 중 마지막인 시샤팡마를 등정하고 내려오자 매스너는 ‘당신은 2인자가 아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축하전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쿠쿠치카에게 동계 올림픽 동메달(명예)을 수여하려 했으나 본인이 거부한 일화도 그가 등반을 스포츠가 아닌 그 이상의 가치로 여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 사건이다.

 

(5)휴먼 등반대-시신 회수, 쓰레기 회수 

 

우리나라에서는 꼭 등반을 위한 원정대가 아닌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히말라야 등반대가 있었다. 2004년 5월 장민 등반가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내려오던 박무택 등반가는 설맹에 걸려 장민으로 하여금 구조를 요청하라고 내려보낸다.

 

그러나 장민은 조난을 당했고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당시 캠프3에 있던 백준호 등반가가 단독으로 등반에 나섰으나 그 역시 실종되고 만다. 


박무택과 4번의 히말라야 등반을 함께 했던 엄홍길은 그의 주검이 일년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단지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등반대를 꾸리는데 그 이름이 ‘히말라야 휴먼 원정대’ 였다. 

 

 

 

결언

 

혹자는 등산을 하는데 무슨 역사나, 생각이 필요하냐는 반문을 하기도 한다. 등산은 행위일 뿐 이라고 일축하면서. 하지만 인간에게는 철학이 없는 서사가 없다.

 

한 발짝을 딛어도 어디로 간다는 생각이 앞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등반의 역사는 인문학적 분야로 자리매김해야하며, ‘등산’ 자체는 행위로서 나누어야 마땅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랜시간(약 50년쯤) 등산을 하다보면 주위에 사라진 동료가 한 둘 이상은 되고 자신도 부상과 장애를 입어 험난하고 고달픈 시간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처음 근대등산을 시도했던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당대에 혹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등반’ 을 해낸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도 지친 자신에 대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짧은 지면에 ‘등산의 흐름’을 담으려 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며, 다만 짧은 시간에 줄거리라도 알고 싶은 분이 있겠다 싶어서 이번 글을 써보았다고 취지를 밝힌다.

 

물론 많은 사례를 담아 설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면적인 아쉬움이 있다. 지금의 등반방식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고 자신은 그냥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산을 올라도 되는가에 대한 인식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혹시 더 알고 싶은 분들께 키워드라도 제공했다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따지고 보면 등산사조가 첨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던 것들이 연장되어 새로운 스타일로 정착된 것일 뿐이다.

 

즉 정신은 늘 최고조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장비가 다음의 사조를 실현시켜 주는 단초를 제공하며, 차원을 달리하는 등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식상해질 때 등반가들은 다른 시도를 통해 주류를 만들고 결과론적으로 이를 사조로 정리했다는 것이 맞는 경우라 하겠다.

 

결국 등반의 세계에서 발전, 진보라는 의미는 가치가 있을까 싶다.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세속적이며 당연히 당사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자고 등반을 시도하는 것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인홀트 메스너가 던진 화두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등반사조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등반을 시도하든지 ‘살아서 돌아와야’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사정으로 연재를 끝내 몹시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미처 다루지못한 분야인 빙벽등반, 독도법, 고산등반, 응급처지법, 등반계획개요 등은 다음 기회에 지면이 허락한다면 소개해 드릴 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