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인문학적·명승지 반영…
역사서·지리지 또는 유산록·명산기에 나타나
역사적으로 한국 명산의 지정에는 두 가지 차원이 드러난다.
하나는 지정 주체로서,
국가의 공식적이거나 민간의 비공식적인 차원이다.
다른 하나는 지정 속성으로서,
정치·지리적이거나 인문적인 차원이다.
통일신라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국가의 명산지정은
산악신앙 및 지정학적 특징이 뚜렷하고,
조선 후기 유학지식인들의 명산지정은
인문사상 및 명승지로서의 명산 인식이 잘 반영돼 있다.
명산지정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역사서正史나 관찬지리지에 나타나고,
비공식적인 자료는
민간에서 편찬한 산수록, 명산기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과정은
현대 한국의 100대 명산지정에 있어
중시되어야 할 문화역사적 지표로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항간에 알려진 우스갯소리로
한국 명산의 특징을 여자의 나이로 비유한 말이 있다.
설악산은 20대인데,
멋스러울뿐더러 언제 어디로 올라도 재미가 색다르다.
지리산은 30대인데,
산체도 풍성하거니와 골짜기도 깊고 어디라도 물이 철철 흐른다.
북한산은 40대인데,
언제 누구라도 다 올라간다.
남산은 50대인데,
곁에 가까이 있어도 잘 안 올라간다.
여자의 몸을 대상화한 이 농담의 지은이는
아마도 서울사람일 것이지만,
각 명산의 지형적,
지리적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남산도 나라의 명산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남산의 위상은
수도 한양의 중심에 있는 위치로 말미암아
나라에서 중요한 산의 반열에 들었다.
고지도에서도 남산의 자취는
전국의 주요 명산과 함께 뚜렷하게 재현되었다.
남산이 차지하는 국가적 위상과 가치평가는
조선왕조에 의해 상징적 작위까지 받는
신성한 남산으로 탈바꿈시켰다.
태조 4년(1395) 12월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칭호로 봉작해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조선 때는 북한산이 나라의 으뜸산
서울의 산은 조선시대에 와서 최고의 영광에 달했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서울이 조선의 왕도가 되면서
북한산(삼각산)은 나라의 으뜸산이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은 나라의 열두 명산
(삼각, 백두, 원산, 낭림, 두류, 분수, 금강, 오대, 태백, 속리, 육십치, 지리) 중에
삼각산을 첫 번째로 두었다.
“삼각산을 산의 머리로 삼은 것은
서울을 높인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는 백두산을 두 번째로 쳤다.
사실 삼각산은
신라 때만 하더라도 소사小祀 정도에 올랐던 산이었다.
그 산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이 되는 덕에
국가의 손꼽히는 명산의 반열에 들더니,
조선조에 와서는 하루아침에 나라의 으뜸 산이 된 것이다.
삼각산은 나라의 산천 제의로서는 가장 격이 높은
중사中祀에 올랐음도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확인된다.
북악산(백악)은 또 어떤가.
한갓 이름 없는 산봉우리에 지나지 않던 것이
조선왕조에 와서 국왕의 존엄을 상징하는 산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백악이 있음으로 인해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고,
백악과 남산의 축선에 맞춰
궁궐이 배치되고 한양의 도시구조와 도로체계가 형성됐다.
백악은
조선왕실에서 나무 한 그루 돌부리 하나라도
손대면 안 되는 지중하고도 신성한 산이었다. 그
래서 당연히 나라의 작위까지 받았다.
태조 4년(1395) 12월, 백악산신을
‘진국백鎭國伯’으로 봉하고 국가의 제사를 받들었던 것이다.
백두산의 지정학적인 정치지리도 살펴보자.
백두산이 명실상부한 국토의 머리산으로 역할하게 된 것은
15세기에 조선의 영토로 확보되면서부터였다.
18세기 초(1712년)에는
청나라가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定界碑를 건립하자,
백두산의 정치적·영토적 의의가 부각되었다.
이후 실학자들의 자주적 국토인식으로
영토의 종주宗主로서 백두산의 의미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고지도에서 표현된 백두산을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글자 표기만 있지,
조선 후기의 모습처럼 그림으로 강조되어 표현되지 않았다.
16세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에 와서야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산으로 뚜렷이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배경에서 18세기에 들어 신경준은
백두산을 나라 12명산의 두 번째로 지정했고,
정약용은
“백두산은 동북아시아 여러 산들의 조종祖宗”이라고까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에 이른 것이다.
역사·지리·정치·문화적 사상과 관념 투영
이렇듯 국토의 명산 개념과 국가의 명산지정 배경에는
역사·지리·정치·문화적인 사상과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왜 그 산을 명산으로 지정했는지에 대한 지정주체
혹은 집단의 가치관과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명산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임도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경주의 삼산三山들이 최고의 명산이었고,
고려시대는
개경의 송악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삼각산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명산의 정치·지리적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명산으로 지정된 산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특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지리산처럼
지형적으로 아주 높거나 커서 명산이 되고,
백두산처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명산이 되기도 한다.
북악산처럼
정치공간의 중심지인 왕도와
궁궐의 주산으로의 위상 때문에 명산이 될 수 있다.
그밖에도 지방의 여러 명산들처럼 랜드마크가 될 만한 규모이자
경관미가 뛰어난 산이 명산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으로 인해 명산이 되고
명산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산도 있다.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이 그렇다.
현재 청량산은 한낱 군립공원의 위상에 불과하지만,
조선 중기에는 이황 덕에
유학자들에게는 지리산과 버금갈 만한 명산으로 취급받았다.
퇴계는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어 불렀을 정도로 청량산을 마음에 두었기에,
청량산은 퇴계로 상징되는
영남유학자들의 성산聖山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명산을 일차적으로 규정했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기원은 국가의 명산제의를 꼽을 수 있다.
고대의 명산제의에서 비롯된 그 원형은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계승되었다.
고대의 명산제의는
국가의 운명이 산천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는
고유의 산천숭배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명산제의를 주도한 사회계층집단은 왕족과 지배권력층이었다.
그들은 왕도를 중심으로
지리적인 요처와 지정학적 요충지에 명산을 지정하고
의례를 행함으로써 권력을 보장받고자 했다.
역사적 과정에서
제의 대상으로서의 명산 스펙트럼은 어떻게 나타날까.
통일신라의 명산제의로서,
<삼국사기>의 ‘제사’ 조에는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중·소사로 한다”고 했다.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국가영역 안에
다수의 명산들을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영토를 수호한다는 관념을 드러냈다.
대·중·소사 대상의 명산으로 지정된 나력(경주로 추정),
골화(영천으로 추정), 혈례(청도로 추정),
토함산(경주), 서술(경주) 등의 산들이 모두 경주
또는 그 인근에 위치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39개가량의 명산을 지정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전국 41개 명산 지정
한편 고려시대의 명산제의는
전래의 지정학적 영역화와 산악신령에 의뢰한 피보호 관념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를 해결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고려사>에,
“금년은 봄부터 비가 적게 내리니…
북쪽 교외에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산악岳,
진산鎭, 바다, 강瀆과 모든 명산대천에 빌었다”는 등의
풍수해에 기인한 의례가 자주 나타난다.
관찬지리지에서는 명산도 공식적으로 지정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41개의 명산이 지정되어 있다(표1 참고).
조선의 태종·세종 대에 개편된 국가제사에서
그 체제나 내용은 철저하게 유교식 예제가 준용되었다.
그리고 명산제의의 장소도
조선왕조의 중심지인 왕도와 국토의 영역에 맞추어 재편되었다.
삼각산이 중사에,
남산이 소사에 새로 포함되어 있는 점은
두 산이 한양의 주요 산으로서 상징성과 영역성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정황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서
<세종실록> ‘오례’에는 중사와 소사의 대상으로 기재된 17개의 명산이 있다.
명산의 위치는 전국지도 상으로도 그려졌다.
명산제의로 지정된 산 외에도 나라의 주요 명산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국적으로 42개의 명산이 기재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에 명산은 나라의 작위도 받았다.
<태조실록>에,
“경내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의 여러 산과
진주의 성황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했다”고 했다.
이는 명산의 위계화 및 편제를 통한
왕조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한 상징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명산지정과 혁파,
명산분포의 시대적 정황과 변천 사실도 공간적으로 드러난다.
삼국과 통일신라기에는
왕도를 중심으로 명산이 배치되지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 및 지방통치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명산 분포가 점차 지방으로 확대되고 수적으로도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나라에서 지정하는 명산의 숫자와 공간 분포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수적으로 증가되고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예컨대,
조선 초기의 관찬지리서인 <경상도지리지>(1425)에 의하면,
영남지방의 대다수 군현들에 명산이 지정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양상은
지방행정체계의 정비과정과 관련해
지방 군현을 명산과 관계 지음으로써
명산이 지역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명산의 지점 및 분포의 시대적 차이가 나타난다.
명산은 정치공간의 중심지(왕도) 및 국토영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각산, 화악, 겸악, 계룡산, 월악, 가야산, 태백산, 지리산,
월출산, 무등산, 금강산은 조선시대의 주요 지리지에서 공통적으로 지정되었다.
반면 월형산, 서술, 나력, 골화, 혈례, 토함산, 웅지 등의
많은 산이 통일신라 시기에는 명산으로 지정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명산의 반열에서 빠져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했던 통일신라시기의 명산 배치가
조선시대에 한양이 중심이 되면서 영토의 중심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도 그렇다.
통일신라시기에는 경상도에 다수의 명산이 지정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경기권을 중심으로 다수 명산들이 분포되어 있다(그림 1·2 참조).
조선 초기의 명산제의 대상을 보아도
경상도에는 우불산과 주흘산만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명산의 분포는
지리적인 영토 확장 및 그에 수반된 생활권의 확대와도 관계가 있다.
예컨대 통일신라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명산이 지정돼 있지 않았지만,
조선 초기에는
두 지역에 여러 명산들이 새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종대에 추진한 북방 개척정책에 의해
행정체계가 새로 정비되고 생활권이 확장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조선 후기 들어서 명산지정에 있어 민간지식인,
특히 유학자의 주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유학지식인들 중심으로
가거지 생활권의 입지 요건 및 수양 장소로서
실제적 관심이 증대되면서 명산 가치가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요 명산을 유람하거나,
지방의 명산 혹은 인근에 주거지·누정·별장 등을 두는 등,
생활 명산으로 수신하는 곳으로 삼았다.
사대부들에게 가거지 선택의 요건으로서
산수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명산에 대한 인지도가 커졌다.
특히 실학자들은
인격도야가 가능한 생활권으로서 명산에 관심을 가지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지식정보를 집약해 명산기 혹은 산수록을 저술·편찬했다.
그 대표적인 18세기의 저술이
택리지로 알려진 이중환(1690~1752)의 <동국산수록>이다.
이중환은 이 책에서
‘나라의 큰 명산’國中大名山이라 하여 12개의 산을 지정했다.
금강산을 제1 명산으로 부르고,
금강산을 포함한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총 8개의 명산을
‘국토의 등줄기에 위치한 명산’嶺脊名山으로 따로 분류했다.
그밖에
칠보산, 묘향산, 가야산, 청량산을 ‘네 명산’四山으로 적었다.
이 명산들의 장소성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한 ‘나라의 네 명산國中四山’을
오관산(개성), 삼각산(한양), 계룡산(진잠), 구월산(문화)이라 했다.
명산지정의 이유로서,
이 산들의 모양은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를 이루고,
산은 빼어나고 물은 맑으며,
강과 바다가 모이는 곳에 맺어 국량이 큰 곳이라고 했다.
지방의 명산은
청평산(춘천), 모악산(금구), 학가산(안동), 적악산(원주), 무성산(공주),
광덕산(천안), 가야산(해미), 성주산(남포), 변산(부안) 총 9산을 들었는데,
이 산들 중에서 큰 산은 도읍지가 될 만하고,
작은 산은 덕 높은 사람高人이나 은사가 숨어 살 만한 땅이라고 말했다.
<동국산수록>에서 이중환이 지정한 명산과
그 명산지정의 해설을 살펴보면 지표가 훨씬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명산의 가거지 용도로서의 적합성,
산수지형 및 경관의 빼어남,
명산의 역사적 유래와 명현名賢의 존재,
산수미학의 탁월성,
풍수지리적인 우수한 입지 관념 등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지녔던 산에 대한
실용주의적, 유학사상적 관심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19세기 조선 후기 지식인 중에,
명산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집성해 책을 편찬한
실학자로 특기할 만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성해응(1760~1839)이다.
그가 저술한 <동국명산기>에는
우리나라 명산과 명승지에 관한 장소 정보가 들어 있다.
이 책에서는 전국을
경도京都, 기로畿路, 해서海西, 관서關西, 호중湖中,
호남湖南, 영남嶺南, 관동關東, 관북關北의 아홉 권역으로 구분했고,
각 지역의 명산과 명승의 위치,
형세, 형승, 고사, 명인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이
44개가량의 주요 명산 항목을 뽑아 해설했다.
산림청 100대 명산,
역사문화적 비중 반영 못 해
이상과 같이 살펴보았지만,
한국의 명산은 지정주체의 정치사회적 측면과
문화사상적인 측면이 상호 복합되어
시대적·지역적으로 다채롭게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위치와 분포가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오늘날의 명산지정 역시
현대인의 명산에 대한 가치와
현대적 의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기존에 산림청에서 지정한 100대 명산이 있지만,
역사문화적인 비중과 가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한계가 여실하다.
국토의 산악과 관계 맺은 겨레의 오랜 문화전통에 비추어,
‘한국의 100대 명산’ 지정에 더욱 신중한
역사지리적, 인문적 성찰이 보완될 필요와 이유가 있다.
<동국명산기>의 명산 항목
인왕산(仁王山), 삼각산(三角山), 도봉(道峯), 수락산(水落山),
백운산(白雲山), 미지산(彌智山), 소요산(逍遙山), 보개산(寶盖山),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磨山), 천성산(天聖山), 계룡산(鷄龍山),
속리산(俗離山), 월악(月嶽), 가야산(伽倻山), 청량산(淸凉山), 도산(陶山),
소백산(小白山), 사불산(四佛山), 옥산(玉山), 빙산(氷山), 태백산(太白山),
금산(錦山), 내연산(內延山), 금골산(金骨山), 덕유산(德裕山), 서석산(瑞石山),
월출산(月出山), 천관산(天冠山), 달마산(達摩山), 한라산(漢拏山), 지리산(智異山),
변산(邊山), 총수산(蔥秀山), 구월산(九月山),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설악(雪嶽),
화음산(華陰山), 청평산(淸平山), 묘향산(妙香山), 금수산(錦繡山), 백두산(白頭山), 칠보산(七寶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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