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산악회의 역사] 등산 대중화 큰 역할…인터넷·코로나로 타격
1974년 1월 ‘안내등산과 산악운동’을 주제로 한 토론회가 월간<山>에서 열렸다. 고인이 된 국어학자 이숭녕 서울대 교수를 비롯 각계각층의 인사가 참여했다. 잠깐 1974년의 그 자리로 돌아가 보자.
원도근(등산애호가) 저는 안내등산 참가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안내등산을 해줘서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여러 단체를 따라 다녀봤지만 버스 중에선 강제로 노래시키고 시간 안 지키는 것은 정말 불유쾌하더군요.
지난 가을에 1박2일로 어딜 갔는데 여관에 재우고 이부자리를 준다고 약속했는데, 정작 가보니 절간에 8명을 합숙시키고 이부자리는 없고 방에 불도 안 때주더군요. 이런 점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태국(한국산악회 회원) 안내등산 진행하시는 분들이 한번 모여 의논을 해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같은 산을 같은 날 너무 치우치는 경향이 있고요. 요금도 서로 달라서 갈팡질팡하는 수도 있어요.
적어도 당일 코스는 1,000원 정도가 적정선이다 하고 생각하는데 어떤 곳에선 600원 또는 700원을 받고 회원을 모집하니 회비 싼 것이 불안해서 마음이 안 가요.
지난번 오봉산에서 겪은 일입니다만 어떤 단체 리더가 자일을 다룰 줄 몰라 아슬아슬한 꼴을 보았어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 끌어 올려주고 오는 바람에 시간 차질이 생겼어요.
안경호(요산회 대표) 다 좋은 말씀이지만 둘 다 문제점이 있다고 봅니다. 안내산악회 대표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나 영리성이 개재되어 있는 한 어떤 타협점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울 걸로 봅니다.
관광회사처럼 큰 곳들은 자본과 자기 시설을 갖고 있어서 회비에 덤핑을 해서 싸게 내놓는데, 겨울 산은 어렵고 초보자는 위험을 자초하는 현상을 빚게 됩니다.
이숭녕(서울대 교수) 보통 한 단체에서 여러 코스를 광고해 놓고 회원 차는 걸 봐서 일부 코스는 취소하고 또는 돈을 받고 딴 단체에 머리수를 판다고 들었는데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안내등산에도 불신풍조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당시의 토론을 경청하노라면 안내산악회가 대중화된 걸 넘어, 일부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안내산악회는 시작이 아닌 전성기였던 것.
안내산악회의 흐름을 살펴보면,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여가·취미 활동 권장, 자가용 시대 도래, 인터넷 대중화, 코로나19 발생, 기름값 폭등 같은 큰 변화들이 안내산악회 역사와 함께한다.
안내산악회 문화는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국내 최초의 안내산악회는 어느 산악회라고 단언할 수 없으나, 월간<山> 1969년 초대 편집장을 지낸 최선웅씨는 “<한국 100명산>, <한국 300명산> 가이드북을 펴낸 안경호씨와
한국산악회 정인호씨 아들이 함께 운영한 산악회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돈도 벌고 산에도 다닐 요량으로 시작했다가, 안경호씨가 독립해 요산회를 세웠다.
1969년부터 월간<山> 기자로 활약한 박영래(75)씨는 “안경호씨가 운영한 요산회가 1960년대 대표적인 안내 등산회였다”고 한다. 등산을 안내한다고 하여 당시에는 ‘안내등산회’라 불렀다는 것.
일요일 아침 동대문의 대형 주차장에 가면 버스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예약 없이 현장에 나와서 가고 싶은 산을 골라 버스를 탔다.
대장이 많은 곳은 버스 한 대에 3명이 있었다. 선두대장, 중간대장, 후미대장이 각각 회원들을 챙겼다. 또 안전을 위해 로프 한 동은 꼭 배낭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안내산악회 대장들은 수고비 정도의 소액을 받으면서도 산행을 즐기는 등산마니아들이었다. 돈 벌이보다는 좋아하는 산을 가는 즐거움을 더 크게 여긴 이들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가 되면서 안내산악회는 전성기를 맞았다. 경제 성장으로 도로가 계속 생겼으며, 국가적으로도 여가 활동, 즉 취미생활을 장려했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었기에 서울에서 경기도 산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반면 안내산악회를 이용하면 등산로 입구까지 버스로 데려다 주니, 당시 일반인이 지방의 산을 가기 위해 안내산악회를 이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암벽등반을 하는 산악인들은 안내산악회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박영래 기자는 “산악인들은 암벽등반 루트가 있는 북한산과 도봉산만 다닌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워킹산행에 취미가 없었기에 안내산악회를 이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 역사에 있어 안내산악회는 큰 역할을 했다. 박영래 기자는 “안내산악회가 지리산, 설악산처럼 유명 산만 소개하지 않았다”며 “지방의 처음 들어보는 산을 안내산악회에서 주도적으로 안내하곤 했는데,
동행 취재해 기사를 쓰면 늘 대중에 처음 소개되는 산이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대장들이 직접 답사를 하여 등산으로 가치가 있는 산만 소개했다.
지금의 100대 명산이 생긴 데에는 이렇듯 선구적으로 명산을 발굴한 안내산악회 대장들의 노력이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룰 때, 등산을 대중화시키고 건강 증진과 친목, 스트레스 해소에 한 몫을 했다.
1990년대에는 백두대간을 화두로, 산줄기 종주 산행에 안내산악회가 큰 역할을 했다. 일본 강점기에 일본 지리학자가 정립한 ‘산맥’ 개념이 아닌 조선의 지리 체계인 <산경표山經表>가 산꾼들 사이에 종교처럼 번지며, 백두대간과 정맥 답사가 붐을 이룬 것.
종주 산행 특성상 들머리와 날머리가 꽤 멀었는데, 이걸 해결해 준 것이 안내산악회 버스였다. 거인산악회를 비롯해 많은 산악회에서 백두대간을 등산인들 사이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했다.
안내산악회의 몰락은 199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다가왔다.
자가용 시대와 인터넷이 기존의 방식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자가용을 이용한 원점회귀 산행이 붐을 이루었고, KTX 고속철도를 비롯 대중교통이 급격히 편리해지면서 안내산악회 이용객은 줄어들었다.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카페 같은 친목 산악회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후 네이버 밴드나 여러 SNS와 스마트폰 앱을 활용한 산행 방식이 활성화되었다. 안내산악회인지 친목산악회인지 구분이 모호한 형태의 산행이 세대별로 유행하며, 안내산악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코로나로 단체 모임이나 단체 산행 자체가 금지되면서 많은 안내산악회와 여행사가 문을 닫았다. 단체 산행이 허용되고 코로나가 진정될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급등했다. 안내산악회의 장점은 비교적 저렴한 회비인데, 유가 상승으로 회비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여 년 넘게 안내산악회를 운영한 최 모 대장은 “20명 오면 많이 오는 건데, 회비 2만~3만 원 받아서 버스 대절비 50만~60만 원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며 “20명이 안 될 때도 많아 사비로 메워서 산악회를 운영한다”고 한다.
그는 “버스 대절비를 줄이려고 12인승 승합차를 구입해 직접 운전하며 다녔는데, 이마저도 코로나로 회원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하소연한다.
“안내산악회 리더의 소양이 부족하다, 산행 시간이 부족하다, 돈벌이에 급급하다, 예약했는데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취소되어 섭섭하다” 등등의 이런 불만은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 늘 있었다.
하지만 그 많던 안내산악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일부만 살아남아 까다로운 한국 등산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다.
마스크 쓰고 고요히 침묵만 흐르는 지금의 버스도 좋지만, 가끔 억지로 노래시키던 그 때가 그립다.